“퇴직 사유 AI” 이세돌이 새로 배우는 ‘노동’…짠한데, 찡하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
<백수 이세돌>에서 요구르트 배달에 나선 이세돌. KBS 제공
10월 23일, KBS가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예능을 시작했다. <백수 이세돌>. 10년 전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인류 최초의 1승을 거둔 인류의 희망, 인류의 빛, 인류의 포석 이세돌 9단을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장 큰 죄악인 ‘백수’라고 부르다니요?! 그러나 이 제목은 직관적인 진실이다. 알파고와의 대국 3년 후, 바둑계에서 은퇴한 이세돌에게는 또 다른 수식어가 있다. “AI에게 직업을 빼앗긴 최초의 인류.” 이 프로그램의 부제는 ‘알파고 대국 10주년 기념’이다. 2016년 대국을 둘러싼 열기를 생각하면 벌써 10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가도, 이세돌이 “그 이후 놀랄 만큼 한국 사회는 인공지능에 대비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할 때는 등골이 오싹하다. 사실 이 대국은 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성찰과 대비보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 ‘기계를 이긴 인간의 신의 한 수’ 등의 극적인 서사와 밈으로 많이 소비되었다. 이세돌의 대국 이후 6년이 지난 2022년 11월, 챗GPT가 등장했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그리고 이제 많은 분야에서 AI가 일으킨 비가역적 변화가 삶의 기반을 흔들면서 위기감과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백수 이세돌>은 시의성을 반영하면서, 이세돌이라는 ‘신의 한 수’를 내세워 예능의 재미와 노동의 성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린다.
프로그램의 공식 소개는 다음과 같다. “백수 이세돌의 리얼 아날로그 생존 기술 방랑기! AI에게 인류 최초의 1승을 거둔 이세돌, 하지만 10년 뒤 지금, 바둑판을 벗어난 그는… 스펙 하나 없는 ‘백수’일 뿐! 수읽기는 9단이지만, 현장 스펙은 0단인 이세돌이 AI는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일’에 도전한다!” 일을 그만뒀다 한들 명색이 이세돌인데 진짜 백수일 리는 없다. 프로그램이 이세돌의 상황을 다소 과장하는 것은, 장강명 작가의 책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그가 “먼저 온 미래”(장강명, 동아시아, 2025)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세돌처럼 평생을 한 분야에 바쳤더라도, 심지어 자타공인 최고의 자리에 오르더라도, 그것을 ‘직업’으로 삼지 못할 수도 있는 세상이 왔다. <백수 이세돌> 1화의 오프닝에서 이세돌은 이력서를 쓴다. 전 직장에는 프로 기사, 퇴직 사유에는 ‘AI’라고 쓰는 장면 위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흐른다. 그렇다. AI가 일자리를 뺏기 전에는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 라디오 스타는 또 잡지 스타를 죽이며 탄생했다.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어떤 직업은 사라지고 어떤 직업은 새로 생겨나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패널인 장도연과 정재형은 AI 시대의 변화가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우리가 백수 이세돌, 우리의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물론 일인자에게 이입하기에는 양심에 찔리지만, 시청자라는 안전한 지위에 편승하여 대충 넘어가자.)
‘바둑계의 전설’ 이세돌이 22일 서울 영등포구 KBS별관공개홀에서 열린 KBS 새 예능프로그램 ‘백수 이세돌’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처음 등장하는 이세돌은 한낮의 더위에도 자신에게 익숙한 정장 차림이다. 바둑 기사를 그만두었다고 해도, 그 일을 하며 몸에 밴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획 회의에서 이세돌이 AI에게 “내가 이세돌인데, (내가) 절대 못 할 것 같은 직업은 뭘까?”라고 묻자, 고객을 직접 대면하고 판매하는 감정 노동이 대답으로 돌아온다. 이세돌은 AI가 자신을 하나도 모른다며 발끈하고, 제작진에게 자신은 바둑만 해서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없다고 약점을 솔직하게 밝힌다. 이어지는 짧은 몽타주는 앞으로 이세돌이 임할 노동의 여정을 축약해서 보여준다. 그간 머리를 쓰고, 정적이었으며, 혼자 일했던 바둑과 확연히 다른 성격의 노동이 대부분이다. 야구장에서 맥주 팔기, 요구르트 배달과 판매, 한강 수영장 청소가 2화까지의 내용이고 고층 빌딩 유리창 닦기가 예고편으로 공개되었다. ‘생고생 무리수를 두는 예능계 풍운아’라는 자막처럼 평생 앉아서만 일한 이세돌은 말 그대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한다. 프로그램은 이세돌이 경험하는 노동이 섬세하고 즉흥적인 응대, 꼼꼼한 마무리 등을 이유로 ‘아직’ AI가 대체할 수 없고 AI와는 다른 완성도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백수 이세돌>의 정동은 다양하고, 그로부터 노동의 성찰이 가능하다. 패널인 정재형은 시종일관 이세돌을 안타까워한다. 한 분야에 오래 종사하다가 갑자기 초보가 되어 헤매는 동년배를 향한 감정 이입은 음악계에도 깊이 침투한 AI의 영향력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정재형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많은 시청자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 이세돌이 ‘이런’ 일을 하며 고생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짠해하는데,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동의 위계가 반영된 반응이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이 그 재능을 전혀 쓰지 못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아쉬운 일이지만, 만약 이세돌이 ‘바둑보다’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은 노동에 투입되어 헤맨다면 다른 반응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세돌이 체험하는 직종은 저임금에, 비정규직이고, 여성이나 청년들이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종류다. 어떤 노동은 AI가 못해서 ‘지켜지’기보다, AI보다 인간이 싸서 ‘남겨지는’ 일일 수 있다. 계속해서 육체적인 노동이나 3D 노동만 등장한다면 프로그램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의한다는 우려를 피할 수 없을 텐데, 지켜볼 일이다.
이세돌과 함께 일한 멘토들은 이세돌이 생각보다 잘 웃고,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며 호감을 표한다. 이세돌은 바둑의 문외한에게조차 냉철하고 예민한 모습으로 알려졌다. 직업 자체가 그런 성향을 요구하고, 당시의 한국 사회 분위기나 바둑 협회의 관행 등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맥주와 요구르트를 팔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협업을 경험하고, 선배에게 의지하면서 이세돌은 다른 자아를 꺼낸다. 유니폼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에 잔망을 떨고, 눈을 맞추지 않던 버릇을 고치며 사람들의 환대에 응답한다. 나이가 들어 좀 더 유해진 영향,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기질도 한몫하겠으나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실감 나는 장면이다. 도대체 일자리는, 직업은, 노동은 무엇일까? 이세돌은 엄밀히 말하면 백수는 아니지 않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특임교수나 유튜브 촬영을 하고 있긴 하지만) 바둑처럼, 저라는 사람을 대변할 수 있는가.”라고 대답한다. 인간에게 노동은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다. 이세돌이 마지막 ‘신의 한 수’가 정말 ‘이겼으니 괜찮은 것’이었을까 오래 고민하듯,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일에서 보상과 승패를 넘어서는 가치와 의미를 원한다. 무의미하거나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노동을 괴로워하고, 노동으로 정체성을 형성한다. 장강명 작가는 우리 모두에게 닥칠 변화를 먼저 경험한 직업군으로서 바둑 기사들을 인터뷰한 르포르타주 <먼저 온 미래>에서 묻는다. “‘새로운 일자리는 계속 생길 것’이라고 말할 때, 일자리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회적 가치와 자긍심의 원천인가, 아니면 내가 계좌로 상당한 돈을 꾸준히 입금받는 어떤 이유를 말하는가?”(202쪽)
‘백수 이세돌’. KBS2 제공.
이세돌은 설렌다. 평생을 바친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고, 나이도 중장년에 이르렀으니 낯선 일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고집을 내세울 법도 한데 매사 흥미롭다는 태도로 임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정의하는 행위로서 새로운 일자리를 진지하게 탐색 중이기 때문이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다음 촬영까지 스태프들과 함께 숙직실에서 자야 할 때는 수학여행을 온 것처럼 들뜨고, 열아홉 살 어린 맥주 판매 선배에게 진심으로 의지하며, 자식뻘인 아르바이트생들과 한강 수영장을 청소하면서 삶의 애환을 진솔하게 나눈다. 최근 연예인을 포함한 유명인을 ‘천룡인’이라고 부르며, 유명인들이 평범한 노동을 체험하는 예능조차 기만이라며 거부감을 표하는 시청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이렇게 몰입하는 모습은 감동을 선사한다.
‘백수(白手)’를 단순하게 한자로 풀면 ‘흰 손’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노동은 손으로 하는 육체노동뿐이었기에, 섬섬옥수는 일하지 않는 자 혹은 높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시대와 기술이 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노동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인류가 지금껏 경험한 수많은 전환 속에서 이번 회차가 어떤 의미로 남을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이 불확실성과 두려움 속에서 <백수 이세돌>이 잡는 무게 중심은 현재의 충실성이다. 이동진의 유튜브 <파이아키아>에 출연한 이세돌은 은퇴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양복 차림으로 한강 수영장에 입장해서 머쓱해하다가, “젤라또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한번 먹어보겠다.”라며 도전하고, 새로운 일을 통해 자신을 알아간다. 모두가 상상하지 못했던 ‘바둑 없는 세계를 사는 이세돌’이 낙관도 비관도 없이 새로운 삶에 진심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젠가 다가올 미래 앞에서 경험하는 귀중한 선례이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