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새는 ‘저벅’, 잉어는 ‘팔딱’…진열장을 뛰쳐나온 유물들이 20m 런웨이를 걸었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 첫 무대를 연 ‘국새 제고지보’가 런웨이를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국새야, 어딜 갔느냐아~?” 대한제국 황제와 신하 차림의 참가자가 두리번두리번 무언가를 찾는다. ‘저벅저벅저벅저벅’ 소리와 함께 경쾌한 비트가 울려 퍼진다. “폐하! 국새가 오고 있사옵니다~!” 런웨이 끝에서 용 모양 손잡이를 얹은 금빛 국새가 정말 네 발로 걸어온다. “집으로, 집으로 국새가 돌아왔다!”
직장인 네 명이 꾸린 ‘국새에 발이 달렸나’가 표현한 것은 보물 ‘국새 제고지보’.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며 만든 인장이다. 한일 강제병합 뒤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광복 직후 돌아왔다. 손잡이의 용이 신나게 몸통을 흔들다 “콱, 도장 찍는 소리”와 함께 황제와 신하가 ‘국중 밖은 위험해’라고 쓰인 족자를 펼쳐 보였다.
국새가 돌아오는 여정을 온몸으로 표현한 이들은 “‘국중 밖은 위험해’가 유물들에게 외치는 말”이라며 “분장을 준비하면서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거치며 아직 돌아오지 못한 많은 유물의 사연을 알게 됐다”고 했다. 고깃집 연기 배출용 주름 후드에 금색 시트지를 붙인 국새가 눈요깃거리를 넘어 뜻깊은 의미로 관람객들에게 다가왔다. 국새는 황제의 태극기 수신호에 맞춰 ‘띠리띠리띠리리리’ 소리를 내며 퇴장했다. 첫 무대부터 심상찮은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이 잔치의 막을 올렸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에 오른 ‘무연모’가 ‘청동방울’로 변신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에 오른 ‘두꺼비집’이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으로 변신해 있다. 연합뉴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는 진열장을 뚫고 나온 듯한 22개 유물이 25팀의 몸을 빌려 20m 런웨이를 차례로 걸었다. 유물을 보는 데서 나아가 직접 유물이 되어보는 행사다. 2024년 ‘국중박이 살아있다’로 시작해 지난해 ‘국중박 분장대회’로 자리 잡았고, 올해 전국으로 확대됐다. 275팀 643명 가운데 50팀이 춘천·공주·대구·전주박물관에서 권역 본선을 치렀고, 25팀이 결선에 올랐다. 권역 본선에는 약 1만명이 모였고, 참가작 영상도 소셜미디어에서 큰 화제가 됐다. 이날 열린마당 계단도 약 3000명의 관람객으로 가득 찼다.
널리 알려진 유물부터 각 지역의 특색 있는 유물까지 고루 출품됐다. 국새·금보·불상처럼 금빛이 강렬한 유물, 종과 탑, 향로·진묘수·수막새처럼 조형이 독특한 유물이 눈에 띄었다. 미술 전공자들은 몸을 캔버스로 삼았고, 전문 코스프레 참가자(코스어)들은 분장 기술을 우리 유물에 쏟았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있는 반가사유상이 런웨이에 두 번이나 올랐다. 저마다의 반가사유상을 표현한 ‘캡스파&톱’과 ‘이대양’(왼쪽부터)이 관람객을 향해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에 오른 ‘말탄사람둥이’가 기마 인물형 토기로 변신해 런웨이를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반가사유상’은 두 번 등장했다. 웹툰 작가인 이대양씨는 대좌 위에서 잔망스러운 발놀림으로 360도를 돌아 객석을 들썩이게 했다. 전문 코스어 ‘캡스파&톱’은 흰 눈동자와 정교한 손짓, 차분한 호흡으로 미륵보살이 중생을 위로하는 장면을 펼쳤다. 해외 캐릭터 중심인 코스프레에서 한국 문화유산으로 보여줄 것을 찾고 싶었다고 한다. 조선 왕실 금보를 택한 두 팀의 해석도 달랐다. ‘숨고르는 거북이’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두 금보를 함께 재현해 오랜 세월 뒤 복위된 왕과 왕비의 시간에 자신들의 느린 걸음을 포갰고, ‘엉金엉金’은 정순왕후의 금보에 바퀴를 달아 비극의 한을 웃음으로 풀었다.
MBC <라디오스타>에서 참가 소식을 알린 농구 선수 출신 모델 이혜정씨는 옆걸음치는 ‘인간 간돌검’이 됐다. 아들에게 박물관도 놀이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발달장애인 거주시설 이용자 등이 꾸린 ‘동산원’은 김홍도의 ‘서당’을 익살스럽게 재현했고, ‘청동 방울’로 변한 ‘무연모’는 3000년 전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소리를 되살렸다.
‘간돌검’으로 변신한 이혜정씨가 뾰족한 검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자 잉어모양 연적’으로 변신한 전은슬씨가 우승의 기쁨을 발 박수로 표현하고 있다. 배문규 기자
가장 큰 웃음을 일으킨 참가자는 ‘백자 잉어모양 연적’으로 변신한 전은슬씨였다. 푸른 비늘과 둥근 눈을 그린 잉어가 바닥에 엎어져 팔딱였다. 포켓몬스터 ‘잉어킹’처럼 통통 튀며 낚시꾼이 내민 먹이를 쫓았다. 취업준비생인 전씨는 “나 자신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잉어가 급류를 거슬러 용이 된다는 ‘등용문’ 고사는 그의 처지와 겹쳤다. 무엇을 잘하는지 고민하던 취업준비생은 유물에서 지금의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시대와 쓰임이 다른 유물들이 참가자들의 솜씨와 저마다의 사연을 덧입고 런웨이에 올랐다.
25팀의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서툰 동작에는 더 큰 박수가, 긴장한 참가자에게는 환호가 쏟아졌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유물을 통해 드러내는 데 특별함이 있다”며 “전시장에 갇혀 있던 유물은 현재에 살아나고, 참가자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페스티벌로 정착했다”고 말했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에서 우승한 전은슬씨가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부터 상장과 상품을 받아들고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6 국중박 분장놀이 전국편’ 참가자들이 대회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우수상과 최우수상은 각각 5팀에 돌아갔고, 대상은 전은슬씨가 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받은 그는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는데 이번 대회에서 용기를 많이 얻었다”며 기쁨의 ‘발 박수’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3시간 넘게 자리를 지킨 관람객들의 환호소리가 더욱 커졌다.
온라인에서는 이 대회를 ‘한국판 멧 갈라’, ‘한국판 핼러윈’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문화유산 연구와 재현, 음악과 공연, 개인의 이야기를 한데 엮은 이 무대에는 굳이 ‘한국판’이나 ‘코스프레’라는 말이 필요 없어 보였다. ‘국중박 분장놀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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