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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18, 2026

정부가 학문을 망치는 법 [한승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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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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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종교학)

요즘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황병주의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읽고 있다. 이 책에는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에 대한 언급이 한 줄 있다. 조경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가 이곳의 “부지 선정에서부터 관내 조경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관여했다”는 내용이다. 사실 박정희가 이 기관에 이렇게 신경을 쓴 이유는 이곳을 ‘박정희 이데올로기’ 자체를 개발, 교육하는 국가기구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피살되기 전해인 1978년에 제정된 설립법에는 이곳이 “한국문화의 정수”를 연구하여 “주체적 역사관과 건전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민족중흥을 위한 국민정신”을 드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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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한다는 불순한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이 연구원은 국가가 인문사회학을 보호,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본격적인 기구였다. 박정희 정권은 그것이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지배 담론으로서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구체화하고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은 이곳을 연구자와 공무원에게 전체주의적 역사관을 주입하는 기관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홍보하기보다는 그것을 비판하고 해체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유용한 지식을 만들어 내곤 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영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연구원의 역사는 국가의 정책적 요구보다는 학문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학술기관이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되었다. 2005년에는 명칭이 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변경됐고, 근거법에서도 ‘건전한 가치관’이니, ‘민족중흥’이니, ‘국민정신’이니 하는 단어가 사라졌다. 이데올로기적 ‘국학’이 아닌 객관적이고 성찰적인 ‘한국학’의 연구를 지향하게 됐고, 다양한 세부 전공의 심층적인 대학원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한국학 연구 지원과 해외 연구자 양성의 중심 기구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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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차례 위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박근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 국면이었다. 당시의 원장은 훗날 윤석열 부부에 대한 ‘금거북이 청탁 의혹’으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된 이배용이었다. 원장과 일부 보직교수들이 정부의 국정화 추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가운데, 대다수의 구성원과 동문들은 교과서 집필 거부를 선언하고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당시의 성명서들에는 연구원이 과거 독재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과오에 대한 반성과 다시는 학문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표명되어 있다.

최근 ‘공공기관 다이어트 2026’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정부의 공공기관 통폐합 안은 한중연에 또 하나의 위기를 가져왔다. 109개의 기관을 감축해 행정을 효율화하겠다는 이 계획에서 한중연은 같은 교육부 산하 기관이라는 이유로 한국고전번역원, 동북아역사재단과 묶이게 되었다. 각각의 역할 차이에 대한 고려나 구성원들과의 논의 없이 이들을 하나의 기관으로 정리하겠다는 정부 안에 당사자들과 국내외 학계의 반대 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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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연의 입장에서 예산이나 인력 구조의 조정 이상으로 위험한 대목은 주변국과의 역사, 영토 문제를 다루는 정책 기관과의 통합이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연구의 주제와 방향에 제약을 받는 것은 연구자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이다. 특히 그것이 외교적 분쟁과 관련된다면 소속 연구자와 학생, 졸업생들의 활동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온다. 또 국책 기관과의 통합으로 해외 한국학 지원에 한국 정부의 영향력이 강해진다면, 오늘날 급성장하고 있는 이 분야의 잠재력과 신뢰성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실망스러운 점은 학문의 진흥과 자유를 중시해야 할 리버럴 정권하에서 이런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술정책은 예술의 경우처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게 가장 좋다. 이것은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편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연구와 교육에 대한 공적 후원을 통제하는 정권이 입맛에 맞는 성과를 요구하면 결과물의 질은 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의 지원을 줄이는 것은 시민사회에 마땅히 제공되어야 할 지적 자산을 빼앗는 일이다. 국가가 세금을 들여 학술 활동을 후원하는 것은 정권이 아닌 국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학문을 망치는 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박정희처럼 학문을 정책 수단으로 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쓸모가 적어 보이는 학문을 경시하며 고사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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