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과일을 식탁의 중심으로…‘로우코어 뉴트리션’이 제안한 변화 [건강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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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수명은 늘었지만 아프지 않고 사는 ‘건강수명’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국내 질병부담 통계에 따르면 건강수명은 2020년 70.93년에서 2023년 68.56년으로 3년 연속 줄어들었다. 이처럼 오래 사는 것과 건강하게 사는 것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전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요인은 바로 ‘식생활’이다. 초가공식품과 간편식이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건강기능식품과 영양제는 넘쳐나지만, 정작 매일 먹는 밥상에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의 비중은 형편 없이 낮다.
지난달 29일 제주에서 열린 ‘2026 한국식품영양과학회 국제학술대회(KFN International Conference)’에서는 이러한 식생활의 괴리를 좁히기 위한 접근법이 제안됐다. 채소와 과일을 식단의 들러리가 아닌 중심에 놓자는 ‘로우코어 뉴트리션(Raw Core Nutri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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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로우(Raw)’는 무조건 날것만 고집하라는 뜻이 아니다. 원재료 고유의 형태와 색·향·식감을 최대한 살려 섭취하자는 의미다. ‘코어(Core)’에는 이를 어쩌다 챙겨 먹는 건강식이 아니라 일상 식탁의 중심축으로 삼자는 취지가 담겼다. 채소와 과일의 효능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매일 충분히, 꾸준히 먹을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으로 시선을 넓힌 셈이다.

영양소보다 식품 전체…로우코어의 출발점은 ‘통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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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발표에서 특히 강조된 핵심어는 ‘통식품(whole food)’이다. 특정 영양성분만 쏙 빼내 정제하기보다 식품 본래의 형태와 구조를 최대한 살려 먹자는 개념이다. 통식품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라면, 로우코어 뉴트리션은 ‘이를 매일의 식탁에 어떻게 올릴 것인가’라는 실천법까지 아우른다.
첫 발표자로 나선 조진아 충남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로우코어 뉴트리션으로서의 채소·과일 섭취: 건강한 장수와 생애주기별 식생활 실천을 위한 근거’에서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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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무기질·식이섬유·파이토케미컬 등이 어우러진 식품 본래의 구조를 중시할 것 △원재료의 색과 향·식감을 살리면서 가공을 최소화할 것 △불필요한 첨가당과 인공 첨가물 대신 원재료 본연의 맛을 우선할 것 △영양제로 식사를 대신하기보다 매일의 밥상에 채소와 과일을 포함할 것 등이다.
이러한 원칙의 바탕에는 ‘식품 매트릭스(Food Matrix)’라는 개념이 있다. 식품에 포함된 다양한 영양성분과 생리활성물질이 이루는 물리적 구조와 상호작용을 뜻한다. 같은 영양소라도 어떤 식품에, 어떤 결합 형태로 존재하느냐에 따라 체내 소화와 흡수, 대사 과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점이다.
실제 연구에서도 영양소를 식품 전체로 섭취하는 것과 특정 성분을 보충제로 먹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관찰된다.
전신영 순천향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건강한 노화를 위한 과일·채소의 영양학적 이점’ 발표에서 미국 성인 3만 899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소개했다. 비타민 K와 마그네슘 등 일부 영양소를 식품으로 충분히 섭취한 집단에서는 사망 위험이 눈에 띄게 낮았지만, 같은 영양소를 보충제로 섭취했을 때는 이러한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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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에서 건강한 성인 4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소규모 임상시험에서도 채소·과일 자체를 먹은 집단과 이에 해당하는 영양소를 보충제로 섭취한 집단 사이에 일부 항산화 방어 지표의 차이가 나타났다. 비록 연구 규모와 기간에 한계는 있지만, 개별 성분의 합과 ‘식품 전체’가 몸 안에서 내는 힘은 결코 같지 않음을 보여준 결과다.
전 교수는 카로티노이드와 플라보노이드 등 특정 성분의 효능이 밝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채소와 과일이 지닌 건강상의 이점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분에 집착하기보다는 통식품(홀푸드)을 섭취하는 것이 현재 과학이 말해주는 가장 신뢰할 만한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최정화 계명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역시 ‘과일·채소 섭취와 만성질환: 연구 근거가 말해주는 것’ 발표에서 이 같은 관점에 힘을 실었다. 채소와 과일에 든 식이섬유와 칼륨이 혈압과 혈관에 미치는 영향, 장내 미생물의 식이섬유 발효 등 일부 작용 기전은 규명돼 있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유익 성분들과 이들이 복합적으로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는 여전히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즉, 몇 가지 영양소의 효능을 단순 덧셈하는 것만으로는 식품 전체의 가치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망 위험 13% 낮아…건강한 노화와 만성질환 예방에도 도움
이날 발표에서는 채소와 과일을 충분히 먹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장기 추적 연구들도 소개됐다.
2021년 국제학술지 ‘서큘레이션(Circulation)’에 실린 연구는 미국 성인 약 10만 9000명을 장기간 추적하고 다수의 코호트 연구를 종합했다. 그 결과 하루 채소·과일을 5회분(serving) 섭취한 집단은 2회분 섭취한 집단보다 모든 원인에 의한 사망 위험이 약 13% 낮았다.
건강하게 나이 드는 것과 식생활의 상관관계를 살펴본 연구도 있다. 2025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에 발표된 연구는 미국 성인 10만 5015명을 최대 30년간 추적했다. 연구진은 70세까지 생존하면서 11개 주요 만성질환이 없고 신체·인지 기능과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상태를 ‘건강한 노화’로 정의했다. 분석 결과 평소 건강한 식사를 꾸준히 한 사람일수록 노년기에도 만성질환 없이 신체·인지 기능과 정신건강을 유지할 가능성이 컸다. 채소·과일·통곡물·견과류·콩류 등이 풍부한 식사 패턴을 장기간 유지하는 것이 핵심 요인으로 꼽혔다.
성인 4명 중 3명 하루 500g 미달…흰색·초록색 채소에 편중
이처럼 채소와 과일을 충분히 먹어야 한다는 과학적 근거는 탄탄하지만, 현실의 식탁은 권고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하루 채소·과일을 합쳐 500g 이상 섭취하는 19세 이상 성인은 연령표준화 기준 24.4%에 그쳤다. 4명 중 3명은 섭취량이 부족한 셈이다.
문제는 양뿐만이 아니다. 강민지 덕성여대 식품영양학전공 교수는 ‘과일·채소 섭취의 다양성: 현안과 실천 전략’ 발표에서 한국인의 채소 섭취가 특정 종류에 심하게 쏠려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2013~2024년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 약 8만 명분을 통합 분석한 결과, 채소 섭취량의 약 90%가 흰색과 초록색 계열에 집중돼 있었다. 흰색에서는 배추김치·양파·무, 초록색에서는 애호박·대파·오이 등이 주를 이뤘다.
특정 색의 채소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익숙한 식재료에만 의존하다 보니 다양한 색의 채소가 지닌 다채로운 영양소를 접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연령별로는 19~39세 청년층의 과일 섭취 부족이 두드러졌다.
발표자들이 짚은 장벽은 지극히 일상적인 이유들이었다. 씻고 자르는 손질이 번거롭고, 사다 두면 금방 상하며, 낯선 맛과 식감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외식과 간편식에 의존하는 생활 습관도 걸림돌이다. 채소와 과일이 몸에 좋은 줄 몰라서가 아니라, 실천이 어렵다는 얘기다. 연구진이 단순 권고를 넘어 구입과 손질, 보관, 조리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에 주목한 이유다.

‘날것’에 얽매이기보다 일상에서 실천할 방법 찾아야
로우코어 뉴트리션을 제안한 조 교수는 “완전히 가공하지 않은 날것만 먹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위생적인 세척과 손질, 맛과 흡수를 돕는 최소한의 조리는 허용하면서 식품 본래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자는 것이다. 통곡물빵이나 무가당 플레인 요구르트처럼 가공 과정을 거쳤더라도 얼마든지 건강한 식단에 포함될 수 있다.
로우코어 뉴트리션이 제안하는 실천법 역시 실생활과 밀착돼 있다.
첫째, 하루 식사를 계획할 때 채소와 과일의 자리를 먼저 확보하는 것이다. 조 교수는 하루 권장량인 500g을 채소 300g과 과일 200g으로 채우는 방안을 제시했다. 샌드위치나 달걀말이에 채소를 듬뿍 넣고, 하루 한 끼에는 채소 반찬 한 가지를 의도적으로 챙겨 올리는 작은 습관부터 시작할 수 있다.
둘째, 기존 간식을 채소와 과일로 바꾸는 것이다. 무작정 섭취량을 늘리기보다 과자나 탄산음료 등 평소 먹던 간식 자리에 방울토마토나 사과 등을 대체해 넣는 식이다. 전체 섭취 열량을 무리하게 늘리지 않으면서 식단의 질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다.
셋째, 준비와 보관의 번거로움을 줄이는 것이다. 식재료를 미리 씻고 손질해 1회 분량씩 소분해 두거나, 냉장고 안에서도 눈에 잘 띄고 손이 쉽게 닿는 자리에 배치한다. 1인 가구 청년이라면 소포장 제품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대안이다.
넷째, 부족한 양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주스’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조 교수는 채소 중심의 100% 착즙 주스를 ‘로우코어 주스(Raw Core juice)’로 소개하며, 바쁜 현대인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매끼 반찬이나 샐러드를 챙기기 어려울 때 여러 채소와 과일을 한 번에 마실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특히 아침을 거르거나 외식이 잦은 직장인에게 유용하다. 케일·셀러리·사과를 조합해 별도의 설탕이나 시럽 없이 만드는 ‘KCA 주스’가 대표적인 예다.
조 교수는 “특히 아침은 무엇을 먹을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인 만큼, 채소와 과일의 섭취 비중을 높이기에 좋은 기회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주스를 활용할 때는 과일보다 채소의 비중을 높여 착즙하는 것이 부족한 채소 섭취를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다만 착즙 과정에서 불용성 식이섬유가 일부 줄어들 수 있고, 과일을 많이 넣으면 당 섭취가 늘어날 수 있으므로 채소와 과일을 온전한 형태로 먹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부족한 양을 채소 중심의 주스로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채소와 과일 섭취 늘리기 실천을 돕기 위한 교육적 접근도 소개됐다. 강 교수 연구진은 대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적정 섭취량을 알리고 직접 손질·활용해 보는 시범 교육을 진행했는데, 참여자들의 섭취 자신감과 인식 개선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울러 어린이에게는 오감 체험을, 청년에게는 간편한 소포장 식재료를, 노년층에게는 저작·소화 기능을 고려한 조리법을 제공하는 등 생애주기별 맞춤형 접근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됐다.

결국 로우코어 뉴트리션은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자’는 원론적인 구호를 넘어, 누구나 식탁 위에서 지속 가능하게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을 열어주자는 제안이다. 조 교수는 “건강한 식생활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으려면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일회성이 아닌 ‘반복 가능한 일상의 습관’으로 체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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