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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26, 2026

[단독]“성폭력, ‘저항했나’ 아닌 ‘동의했나’를 봐야”…유럽인권재판관의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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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카 산친 유럽인권재판소 재판관이 17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열린 제20회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바실카 산친 유럽인권재판소 재판관이 17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열린 제20회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동의는 바로 그 순간,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관계를 갖겠다는 자유로운 의사를 반영해야 합니다. 과거의 어떤 약속만으로 동의를 추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실카 산친 유럽인권재판소(ECHR) 재판관이 최근 경향신문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산친 재판관은 국제법 교수 출신으로 유엔 자유권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지난해 5월 슬로베니아 몫 유럽인권재판소 재판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지난 17일 서울에서 진행된 제20차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에서는 성폭력·가정폭력에 관한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와 사법적 접근에 대해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기자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성폭력 판단의 중심을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지가 아니라 자유로운 동의가 있었는지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도 강간죄의 판단 축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옮길지를 두고 ‘비동의 강간죄’ 논의가 계속 이어져 왔다. 최근에는 피해자가 75차례 넘게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피고인의 유사강간 혐의가 무죄로 확정된 사건이 헌법재판소 재판소원 사건으로 올라가, 전원재판부에서 심리 중이다.

산친 재판관은 유럽 사례들을 예로 들어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성적 행위에 동의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가 대표적으로 든 것은 2003년 불가리아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14세 여성이 20대 남성 2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했지만, 당국은 물리적 강제나 적극적인 저항을 보여주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수사를 종결했다.

이에 대해 유럽인권재판소는 불가리아가 성폭력에 대한 실효적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유럽인권협약 위반을 인정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심리적 요인이나 가해자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체적으로 저항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친 재판관은 과거 불가리아 당국이 “‘직접적인’ 강간 증거에 지나치게 비중을 둔 나머지 핵심 쟁점인 ‘비동의’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고 했다.

최근 판례는 피해자가 공포 때문에 몸이 얼어붙는 경우까지 고려하는 등 훨씬 폭넓게 상황을 본다. 지난해 프랑스의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여러 유럽 국가가 강간을 물리력이나 위협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어진 동의의 부재’를 중심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기존의 물리력 중심 기준으로는 피해자가 마비되거나 ‘긴장성 부동화(tonic immobility)’에 빠진 상태를 포착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이같은 판단은 무조건 피해자의 말을 그대로 믿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산친 재판관은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거부했다는 직접 증거나 물리적 저항의 흔적이 없더라도 곧바로 동의가 있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당시 두 사람 사이의 신뢰·권위·의존 관계, 피해자의 취약성이나 공포 상태 등 피해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주변 정황을 종합해 동의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 NEWS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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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비동의 강간죄 논의를 두고 일각에선 “결국 피해자 말만 믿고 유죄를 판단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한 산친 재판관의 설명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피해자의 말만으로 결론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엇갈리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더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필요하다면 제때 포렌식 검사를 하고 관련 증인을 조사하는 것은 물론, 통신 기록이나 문서 자료도 확인해 “서로 다른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검증할 수 있는 추가적인 수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동의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피해자의 진술에 특별한 지위를 주는 게 아니라,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를 놓고 어느 쪽 설명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 따져보자는 의미다.

피해자 진술이 일부 달라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산친 재판관은 피해자 진술의 불일치는 트라우마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사건을 완전히 시간 순서대로, 모순 없이 진술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실제로 주장의 신빙성을 훼손하는 것인지, 심각한 심리적 경험에 의한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산친 재판관은 성폭력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과거 행동이나 가해자와의 관계를 ‘동의했다’고 보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한 사건에서는 수사당국이 성폭력 피해자가 과거 가해자를 ‘좋아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봤다. 이에 대해 산친 재판관은 “과거의 친밀감이나 기존 관계 자체가 이후 성적 행위에 대한 동의를 성립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집단성폭행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과거 성생활과 행동 등을 토대로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한 수사기관에 대해 유럽인권재판소가 ‘피해자 비난적 고정관념’이 작동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기준에 따라 유럽에서는 부부 사이에서도 늘 동의가 전제되는 건 아니라고 본다. 프랑스에서는 아내가 남편과 오랫동안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혼 책임을 아내에게 돌린 판결이 문제가 됐다. 유럽인권재판소는 ‘부부 의무’라는 개념이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며, 결혼에 대한 동의가 미래의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의미한다는 프랑스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산친 재판관은 “성폭력 사건은 젠더 고정관념이 인권 보호에 특히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라며 ‘피해자다움’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법관들이 경계해야 한다고도 했다. 예컨대 여성이 성폭력을 거짓으로 주장한다거나, 복수를 위해 신고한다거나, 합의한 성관계를 뒤늦게 후회해 성폭력이라고 주장한다는 식이다. 성별에 따른 이런 고정관념은 증거가 충분히 수집되기도 전에 수사와 재판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취지다.

산친 재판관은 “가장 중요한 점은 국가기관이 2차 피해에 해당하는 어떠한 행위도 삼가야 한다는 것”이라며 “대신 피해자의 존엄성, 신체적·심리적 온전함, 그리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데 특별히 중점을 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관계를 밝힐 필요성이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불필요하게 트라우마를 다시 경험하도록 하거나 침해적인 절차를 겪게 하는 수사 관행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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