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스 같네…남이 써준 답으로 과거 급제한 ‘경화세족’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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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합격은 영광 중의 영광이었다. 모든 문과 급제자는 어사화(조선 시대에,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종이꽃)를 머리에 꽂고 말 위에 앉은 사내는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잡히면서 사흘 동안 거리 행진을 하였다. 삼일유가(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와 친척을 방문하던 일)를 할 때 합격자는 하늘로 올라간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현실적인 문제가 기다린다.
과거 합격자는 해마다 쏟아진다. 하지만 모두가 바라는 좋은 자리, 그러니까 승정원과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이조와 병조의 벼슬 등 명예롭고 권력과 돈이 집중된 자리는 몇 되지 않는다. 이런 곳의 관직을 거쳐야 기름진 지방 수령으로, 마침내는 관찰사를 거쳐 한몫을 잡을 수 있는 법이다. 이렇게 되려면 과거 합격 뒤 관로(官路)에 들어설 때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설명하자면 복잡하기에 하나만 예로 들어보겠다. 예문관이란 중요한 관서가 있는데, 이 관서에서 가장 낮은 관직은 정9품의 검열이다. 품계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자리 같지만, 이게 노른자위 중의 노른자위다. 검열은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한다. 쉽게 말해 사관(史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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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 곧 사관은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왕과 신하들의 대화를 기록해 남긴다. 물론 다른 중요한 사건도 기록에 남긴다. 이 기록물이 사초다. 검열은 품계는 낮지만 왕과 지근거리에 있다는 점과 업무의 중요성 때문에 가장 존중받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이런 자리였으니, 과거 합격 후 관료로 출세를 하려면 반드시 검열을 거쳐야만 하였다. 검열은 고위 관료로 출세하는 데 있어 결정적 길목이었던 셈이다.
1776년 10월13일 이건원, 조헌철, 송준재가 검열로 선발되었다. 정조는 이들을 불러 시험을 보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정해진 절차를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원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조헌철과 송준재는 지방에 있다는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 정조는 다시 시험을 볼 것을 명하였고,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정조 앞에 대령했다. 한창 정조의 신임을 얻고 있던 홍국영의 제안을 따라 세 사람은 원래 그들이 과거를 볼 때 응시했던 과목으로 답안지를 쓰게 되었다. 이건원은 표(表)로, 조헌철은 책(策), 송준재는 부(賦)로 다시 시험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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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지나자 송준재는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다. 정조가 왜 백지를 내느냐고 묻자, 송준재는 “남을 따라 과거에 응시해 요행히 합격했을 뿐 과거 공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지라 지어 올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곧 남의 손을 빌려 답안지를 작성해 과거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조헌철과 이건원 역시 백지를 내었다. 조헌철의 답도 송준재와 같았다. 역시 요행히 합격했기에 답안지를 써서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조가 재차 다그쳤다. “초시(1차 시험)와 회시(2차 시험)에 모두 책문(策問)을 지어 합격했는데, 지금 지어 올릴 수 없다는 게 어떻게 말이 되느냐?” 조헌철은 같은 답을 되풀이했다. “동접의 도움을 받았고 신이 전부 다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곧 과거장에 같이 들어갔던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답안지의 대부분을 작성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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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이건원이 답안지를 제출했는지를 묻자, 이건원 역시 “신도 역시 아는 것이 없어서 지어 올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건원은 회시에서 1등으로 뽑힌 자였다. 그런 자가 같은 과목에서 같은 문제를 냈는데도 백지를 제출했던 것이다. 회시의 1등 합격 역시 남의 손을 빌린 것이었을 터이다. 분노한 정조는 이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글을 지어 올리라고 했으나, 모두 올릴 수가 없다고 답했다.
이건원은 서울의 명문가인 연안 이씨 집안의 자제였다. 아버지는 저 유명한, 대제학을 지낸 이정보다. 조헌철과 송준재의 가문 역시 대대로 고급 관직을 독점한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들 집안 자식들은 수만명이 응시하는 과거에서 제 손으로 답안지를 작성하지 않고도 합격하였고, 또 출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검열 자리에 쉽게 이를 수 있었다. 검열이 된 것도 밀어주고 끌어주는 한 패거리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을 터이다.
이런 자들을 경화세족이라고 한다. 과거장에 팀을 이루어 들어가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이면 모두 그렇게 하지만, 이들 경화세족 가문의 자식들은 과거 답안지 작성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문제를 보고 속사포처럼 답안지의 내용을 입으로 불러주는 사람을 거벽(巨擘), 이것을 받아 단정하게 써 주는 사람을 사수(寫手)라 불렀다. 거벽과 사수 중 어떤 사람은 받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답안지의 수준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또 경화세족들은 평소 거벽의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집안으로 불러 자식들에게 답안지 작성의 요령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답안지 한장 작성하지 못하는 자들이 과거에 합격하고, 검열로 뽑히고, 출셋길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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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보자. 이게 조선 시대만의 이야기 같은가?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답안지를 쓸 수 없는 자식들을 과거에 합격시키고 검열 자리에 올린 자들이 많을 것이다. (사족: 이 경화세족의 자식들에게 답안지를 다시 작성해 보라고 하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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