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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29, 2026

‘납치된 어머니’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금자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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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인민군이 서울에서 물러난 뒤 부역자 재판을 받기 위해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맨 오른쪽 사람의 ‘완장’이 뚜렷하다.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
1950년 9월 인민군이 서울에서 물러난 뒤 부역자 재판을 받기 위해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맨 오른쪽 사람의 ‘완장’이 뚜렷하다.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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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어머님께

엄마!! 얼마 만에 불러보는 엄마인지요.

어렸을 때처럼 엄마라고 부르겠습니다.

6.25 전쟁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혹한 시련이었겠지만, 특히 우리 가족에게는 불과 몇달 사이에 아버지와 엄마를 잃는 정말로 지옥 같은 세상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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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님이 부끄러운 듯 노트를 펼치며 건넸다. 세 번째로 집을 방문한 6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폭염 경보는 내리지 않았지만, 이미 성하(盛夏)였다. 일주일 전 미리 숙제를 하나 내드렸다. 그리운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보시라고 했다. “한창때 겪은 6·25를 꼭 쓰겠다고만 마음먹고 하지 못했다. 책 몇 권이 나왔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표하던 말이 기억나 나름 짜낸 아이디어였다. 그동안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도 유용한 자료로 남을 거 같았다. 여사님은 선선히 그러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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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질문을 보내오셨다. “컴퓨터로 해야 할까요, 그냥 노트에 해도 될까요?” 더 큰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컴퓨터 입력은 여사님 딸의 몫이 될 터였다. 노트에 펜으로 쓰면 된다고 답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노트 속 편지 글씨는 너무 정갈하고 또박또박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문장도 깔끔하고 자연스러웠다. 80대 후반 어르신의 작품으로 보이지 않았다. 애틋한 인사로 시작한 편지는 아버지가 납치되던 날에 이어 어머니가 끌려가던 그 날을 그렸다. 인터뷰 때도 했던 이야기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10월 중순쯤 이웃 사람들이 소나기는 우선 피하고 보라고, 어디든 잠시 가 있으라고 했지만 엄마께서는 내가 죄가 없고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디로 가겠느냐고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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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군복에 ‘공안원'이라고 쓴 완장을 찬 군인이 막내를 업고 계신 엄마를 을지로 입구 쪽으로 연행해 갈 때 작은 오빠와 저는 엄마 뒤를 따라갔지요. 어디로 가시는지는 알아야겠기에….

엄마는 집에 아이들만 있으니 가서 동생들 돌보아라. 내가 죄가 없는데 별일이 있겠냐. 곧 돌아오마 하셨지요.

그러나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작은 오빠는 엄마의 행방을 찾으러 이곳저곳 많이 다녔나 봅니다. 그 후 아이를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고 아기만 데리고 왔지요. 막내는 엄마의 부재를 알았는지 밤낮으로 울어서 24시간 업고 있어야만 했고, 잘 때도 이불을 쌓아놓고 막내를 업은 채 엎드려서 자야만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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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공안원’ 완장을 찬 이에게 연행·납치됐다. 그 뒤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애초 나를 사로잡은 궁금증이었다. 13명의 제헌국회의원이 프락치 혐의로 구속·기소돼 형을 살다가 전쟁통에 급작스레 풀려난 뒤 서울 수복 직전 12명이 북한으로 끌려간 일 이외에, 그 부인까지 불법 연행돼 실종됐다는 사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편지 속에 그 날짜는 쓰여있지 않다. 여사님은 “전후 사정을 볼 때 1950년 10월10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날 어머니는 어디로 끌려간 것일까. 연행되는 어머니를 뒤따라가고, 나중에 직접 막냇동생을 받아온 작은 오빠는 “군부대 같았다”고만 했다. 이후 아이들은 보육원으로 몸을 옮긴 뒤 1·4후퇴와 함께 피난을 간다. 다시 여사님의 편지를 읽는다. 볼펜 글씨 속에 고난의 생애사를 꾹꾹 눌려 새겼다.

“열두살 짜리가 두 살짜리를 업고 6살, 8살짜리 동생들은 양손에 잡고 피난길에 올랐지요. 임이(4살)*는 작은 오빠가 자기가 업고 가겠다고 했고. 피난을 가다가 보니까 눈 위에 양지 쪽에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가 울고 있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지요. 아마 큰 아이들을 살리려고 갓난아기는 어쩔 수 없이 버렸나 보다 생각은 했지만, 나는 동생들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지요.

엄마!! 그런데 우리 형제들이 그렇게 장수는 못 한 것 같아요.

이제 임이(당시 4살)와 저만 남았는데 지금도 엄마 얼굴 한 번만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지요.

저는 엄마(39살) 두 배를 넘어 살고 있고 임이는 많이 아파서 걱정이에요.

그래도 우리 7남매 전쟁을 치르면서도 폭격에 다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자라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도 나름대로 잘 키웠어요.

다음 생애에는 엄마를 꼭 만나고 싶어요.

동생들 간수 잘했다고 칭찬받고 싶고 등 두드리며 한번 안기고 싶어요.”

여사님은 나에게 “아버지가 납치당한 것보다 어머니가 끌려간 일이 더 충격이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됐다”고 했다. 보육원에 간 데 이어 1·4후퇴로 동생들과 피난을 떠나면서 명동과는 영영 안녕이었다. 납치된 아버지는 ‘월북’한 게 되었고, ‘월북자 가족’이라는 멍에가 가족을 짓눌렀다. 한동안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입도 벙긋할 수 없는 시간이 지속됐다.

그렇다면 남쪽 공안원에 끌려간 어머니 이필연(이인순)은 어떻게 됐을까.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금자의 아버지 강욱중 의원과 같은 경로로 북한에 끌려간 제헌국회 의원 신성균의 아내 장귀례가 겪은 일이다. 남편의 납북 직후 생후 7개월의 아기를 업은 채 종로경찰서 대한청년단 강당에 감금됐다가 한 달 만에 풀려났다. 취조한 순경은 인민군 점령 기간 무엇을 했냐고 물었다. “남편은 어디 있어? 당신도 여성동맹이나 이런 데서 활동했지?”라고 윽박질렀다.

장귀례는 다음과 같은 증언도 남겼다. “저를 더 오싹하게 만드는 광경은 강당의 외벽을 따라 나란히 눕혀진 시신들이었습니다. 그곳을 지나야 세면장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광경을 어쩔 수 없이 보았습니다. 밤사이 조사를 받다 맞아 죽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앓다 죽거나 굶주려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접하다 보니 시체를 보는 공포도 차츰 일상적인 일처럼 무디어졌습니다.”**

조사받다가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나날이었다. 종로경찰서가 아니라 을지로 입구 군부대로 끌려간 금자의 어머니 이필연도 그곳에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까. 금자는 어머니를 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체념한 채 8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럼에도 거북이 같은 속도로 진실규명의 시간은 슬금슬금 다가왔다. 2021년 9월, 그 첫 단추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생존해 있는 동생 강호림.

** ‘아버지를 위한 변론’(신현국 지음, 에세이스트사, 2018)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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