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떠나자…그들은 어머니를 찾았다 [금자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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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어머니는 뭐하시는 분이었나요?”
“가정주부셨죠. 결혼 전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다고 했어요. 1911년생이신데 이필연과 이인순 두 가지 이름이 있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만나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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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니 뭐 중신했겠죠. 자세히는 몰라요. 어머니는 경남 양산이 고향인데, 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대요. 외할아버지는 목사님이었고. 그래서인가 저는 일요일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영락교회 주일학교에 다녔어요. 무궁화반이었죠. 그때는 영락교회가 가건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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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했던 말들 기억나세요?”
“저보고 꼭 경기를 가라고 하셨어요. 경기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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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기중학교랑 경기여자중학교는 가장 알아주는 명문학교였죠. 입학시험 경쟁률도 제일 높았고.”
“어머니는 숙명인가 진명인가 나오셨대요. 제가 그때 공부를 곧잘 하긴 했지만, 더 잘해서 경기여중을 가라고 하신 거죠.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 한다고…어깨에 힘주고 살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미 어깨에 힘을 주고 살던 때였다. 더 큰 꿈을 꿔야 한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러나 그 꿈이 헛된 사치였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사님과 두 번째 인터뷰를 한 5월이었다. 장소는 처음처럼 딸 부부와 함께 사는 집이었다. 어머니에 관해 묻다가 사진을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여사님은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 뒤지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 들고 온 사진 속에 하얀 한복을 입고 꽃밭을 배경으로 선 어머니 이필연(이인순)이 있었다. 유일한 독사진이라고 했다. ‘강욱중군이인순양화혼식기념’이라고 한자로 쓰인 결혼식 사진도 있었다. 적힌 날짜는 1931년 10월2일. “어머니는 집에서 그냥 허름한 원피스를 입었어요. 마지막까지 늘 2살짜리 젖먹이 막내를 등에 업고 계셨죠. 막내는 한시도 안 떨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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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된 지 1년1개월 만에 아버지는 남로당 프락치 혐의를 쓰고 구속됐다. 이것은 서막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석방된 일은 예측불허의 제2막이었다. 지하실로 들어가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가 서울 수복 직전 북한 요원으로 추정되는 괴한에게 납치된 일은 제3막에 해당했다. 파탄과 파멸을 향한 연속극은 아직도 네번쨰 막을 남겨두고 있었다.
금자의 가족은 전쟁이라는 극한의 조건에서 먼저 살아남아야 했다. 폭격은 매일매일 생명을 위협했다. 서울 인구의 대다수는 전쟁 이후에도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거주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28일 한강 다리가 폭파되며 더욱 한강을 건너기 어렵게 됐다. 미군은 인민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용산의 철도시설인 조차장을 중심으로 공중에서 맹폭격을 감행했다. 금자의 집이 있는 중구 명동 일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폭격에 따른 시민 보호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먼저 도주했다. 공보처 조사에 따르면 1950년 6월25일부터 9월28일까지 공중폭격으로 4250명이 죽고 2413명이 부상했다. 주검의 상당수는 한강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하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폭격 소리에 온 가족이 아버지가 있는 지하실로 피했어요. 이대로 우리 집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나 했지요. 잠잠해져서 밖에 나왔더니 명동성당 뒤쪽이 폭격 맞았다고 했어요. 폭격기가 오기 전 정찰기 소리가 들리면 명동 사람들은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방공호 속으로 피신했다가 해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돌아갔지요. 일제 시대에 파놓은 방공호였어요. 우리 집에서 보면 신세계백화점의 전신인 동화백화점과 지금 명동예술극장으로 바뀐 시공관만 크게 보였고, 대부분의 건물이 폭격에 무너져 있었어요. 여기저기서 연기가 모락모락 새 나왔고요. 우리 집은 다행히 폭격을 피했어요.”
금자는 가난이 어떻게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지도 배웠다. 하루는 어머니가 납작보리로 죽을 쑤어 남매들을 먹였다. 납작보리란 보리를 찌거나 삶은 뒤 납작하게 눌러 만든 것이다. 쌀을 구하지 못해 납작보리로 죽이라도 써서 양을 늘린 뒤 자식들 끼니를 때우게 한 것이다. 금자는 어머니가 뒤돌아서서 냉수 한 대접에 간장 한 숟갈 풀어 입에 넣는 걸 우연히 보았다. ‘왜 저 맛없는 것을 마실까. 소화가 안 되시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몫은 안 남긴 어머니가 허기를 달래는 모습임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어머니는 유령처럼 숨어있는 남편과 아이들의 끼니를 책임지기 위해 남대문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다. 시장에서 떼어서 판 양잿물도 그중 하나였다. 명동 집에는 함안 할아버지 댁에 내려가 있는 큰오빠를 제외한 6남매가 기거했다. 남대문시장에서는 당장 양식을 구하기 위한 이들의 즉석 물물교환이 이뤄지고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댁은 혼수 이불과 베개를 들고나와 팔기도 했다. 작은 오빠는 집에 있는 세탁비누 몇장을 들고 멀리 의정부까지 간 뒤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의 애를 태웠다. 그곳에서 누군가 빨랫비누를 쌀과 바꾸어준다는 소문에 혹했다고 했다. 열흘이 다 되어 돌아온 오빠는 빈손이었다.
아버지가 괴한에게 납치된 직후 서울이 수복됐다. 다시 세상이 바뀐 것이다. 인민군이 퇴각한 서울 곳곳에선 적에 부역한 이들을 찾으려는 살기 어린 눈길이 번들거렸다. 아버지는 부역자는 아니었으나, 인민군에 의해 풀려났다가 사라진 정치범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소나기는 피하고 보라”고 했다. 아버지의 행방을 물어볼 텐데, 문초를 당할 대상은 어머니뿐이었다. 실제 시퍼런 작업복을 입은 이들이 집으로 두번이나 찾아왔다가 허탕을 쳤다. 어머니는 몇차례 피신에 성공했지만, 마냥 집을 비울 수는 없었다. 지인들의 냉대를 느꼈다. 아이들을 건사해야 했다. 무엇보다 죄가 없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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