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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October 5, 2026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쓴 책들이 내 학문에 큰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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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한 사람의 학문적 성장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매우 다양하겠지만, 그 가운데도 크게 두드러지는 다음의 두 가지를 뽑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을 잘 만나는 것이다. 나는 스승 복도, 책 복도 그리 잘 타고난 사람이 아니지만, 굳이 한 쪽을 선택한다면 책 쪽이 더 큰 역할을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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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졸업 무렵, 성급하게도 나는 우리나라의 장래가 과학기술의 진흥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여 공업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했다. 그러자 첫 학년 담임 선생님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장래 대학 진학이 어려울 것이니 중요한 것들을 혼자 미리 학습해 보라고 하시며, 한 외국인이 지은 미적분학 입문서 번역본 한 권을 빌려주셨다. 미적분학이라면 당시 토목 기사셨던 아버지에게서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미적분이라고 하는 매우 신통한 수학이 있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혼자 공부하려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너무 어려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더 열심히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읽어보니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제 말로만 듣던 미적분학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에 아버지께 자랑했고, 아버지는 한술 더 떠 이제 자신에게 좀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지금이라면 쉽게 설명해 드렸을 텐데, 아쉽게도 그 당시 내 수준은 아버지를 이해시켜 드릴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는 하나 이 학습경험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했기에, 지금 러브(Love)라고만 기억되는 어느 저자의 이 책이 한없이 고맙게 여겨진다.

내게는 이처럼 정규 교육과 내 학습이 어긋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로 생각되는데, ‘물리’라는 과목이 있었지만 불과 두세 시간 배운 후 물리 담당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전직하셨다. 그러고는 학교가 물리 선생님을 다시 구하지 못해 물리 수업을 거의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공과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던 내게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나 할까, 이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다행히 선생님 계실 때 정해진 물리 교과서가 있어서 나는 혼자 공부했고, 이 일은 결과적으로 내 학문의 진로마저 바꾸게 했다. 공부를 해보니 물리학이 너무도 재미있어서 나는 공과대학에 가려던 생각을 바꾸어 당시 문리과대학에 있던 물리학과로 진학한 것이다. 그때 내가 읽었던 교과서는 상·하 두 권으로 된 책이었는데, 그 저자인 방성희 선생은 일찍이 공과대학 교수를 잠시 역임하신 분으로 물리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또 이 책이 널리 선호되고 있던 교재도 아니었다. 이후 나는 어느 학교에서 이 책을 교재로 쓴다든가 누가 이 책을 교재로 배웠다든가 하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당시 내게는 이 책이 너무도 적합해 내 삶의 방향마저 바꾸게 해 준 것이다. (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한 여성이 방성희 선생의 따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무척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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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잘 만날 행운은 그러나 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학을 본격적으로 전공한다는 대학에서는 오히려 내게 맞는 수업도 내게 맞는 책도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조순탁 교수가 ‘물리학연구’라고 하는 학생들이 발간한 잡지 창간호에 ‘이론물리학에의 길’이라는 글을 실으면서, 앞으로 학생들이 공부해야 할 책들을 학년별로 자세히 소개한 일이 있다. 당연히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던 책들이기는 하나, 우리로서는 구할 수도 없었지만, 설혹 구해 읽으려 해도 그 분량이 너무도 방대하고 또 수준이 높은 책들이어서 사실상 의미 있는 학습이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나도 몇 권을 건드려 보았지만, 별 진척을 얻은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적절한 책을 구해 이해를 도모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내키지 않은 강의에만 쫓기다가 졸업했다.

내가 다시 내 물리학 지식을 정리하고 진전시킬 좋은 책 몇 권을 만나게 된 것은 대학 4년을 마치고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드브리지 콘스탄트라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쓴 2권으로 된 ‘이론물리학’(Theoretical Physics)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당시 내 어지러운 물리학 지식을 잘 정리해 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내가 크게 도움을 받은 책들이 몇 권 더 있지만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당시의 이름난 교과서였거나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명저들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명품보다는 내 몸에 맞는 허름한 옷들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 시절에 걸쳐 내가 좋아했던 과목이 물리학이었다면, 내가 싫어했던 과목은 생물학이었다. 마치도 물리학 체질이 따로 있고 생물학 체질이 따로 있기나 하듯이, 나는 생물이라는 과목에 대해서는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인슈타인 또한 학생 때 생물이란 과목을 무척 싫어했다니까 나는 적어도 체질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을 닮은 셈이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내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거의 마쳐 갈 무렵, 당시 유전자의 디엔에이(DNA) 구조가 밝혀졌다고 하여 학계가 떠들썩했다. 나 또한 생명의 신비에 대해 일정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본래부터 생물학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다 보니 이러한 논의에 끼어들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도서관을 뒤지다가, 우연히 이 분야에 대한 책 한 권을 골라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용이 이해될 뿐 아니라 그 안에 전혀 새로운 신비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미 터득한 물리학적 지식의 바탕이 있었기에 더 쉽게 이해되었고, 내가 생물학에 대해 완전 문외한이었기에 더 신비로워 보였는지도 모른다. 책에서 설명하는 현상적 상황은 물론, 책이 미처 말하고 있지 않은 내면적 이치의 흐름까지 내 눈에 선명히 감지되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내가 이 분야에 의미 있게 발을 들여놓을 최적의 계기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나는 내 남은 학문적 생애를 생명 이해에 바쳤으면 하는 생각을 했고, 내 지도교수에게도 곧 이 뜻을 표명했다. 심지어 나는 교수님 자신도 함께 이 분야에 뛰어들 생각이 없으신지 묻기조차 했다. 그분은 자신은 이미 나이가 많아 별 의향이 없지만, 나더러는 젊으니 한번 해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격려했다. 그 후 나는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해 생물학 쪽으로 전향하지는 않고 물리학자로 활동해 오고 있지만, ‘생명의 이해’라고 하는 커다란 화두를 필생의 과제로 삼고 지금도 계속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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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회상하면서 내가 그때 읽은 책의 저자가 누구이며, 그 책의 제호가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하지 않고 넘긴 것을 무척 후회하고 있다. 그것만이라도 알았으면 지금이라도 그 책을 다시 찾아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심취했었는지를 되짚어 볼 수 있겠는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말하자면, 강을 건너기 바빠 배도 사공도 모두 잊어버린 셈인데, 지금으로써는 그 고마움을 치하할 방법이 없다.

요즈음은 특히 혼자 공부해야 할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이 있다. 에이아이(AI) 곧 인공지능을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내 경우를 보자면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작은 사실 하나 확인하기 위해 서가를 여기저기 뒤지며 관련 서적을 찾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자판에 몇 글자만 누르면 몇 초 안에 답이 우수수 쏟아지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다 신뢰할 수 있는 답들은 아니지만, 의심스러운 점은 또 나름의 방식으로 검증해 볼 수 있으니, 이것만큼 편리한 것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고 공부할 책의 성격 또한 크게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중요한 내용을 되도록 많이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제는 필요한 것을 잘 물어보고 그 얻은 대답의 진위를 잘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그러려면 관련 분야에 대한 입체적 파악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전체적 맥락을 그 핵심적 내용과 관련하여 잘 정리해 주는 책이 필요하게 된다. 이제 이러한 책을 어떻게 찾아내며 또 이러한 책을 어떻게 저술할 것인가 하는 것이 새 학문 성취의 관건이 되고 있다.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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