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정당은 세이렌의 유혹…새 통합정당으로 꼭 원내 복귀할 것”

광고
진보정당 하면 노회찬·심상정 정도만 떠올리는 이들에게 양경규는 낯설다. 민주노동당·정의당 같은 소수정당에 꾸준히 투표해온 이들에게도 그 이름이 생소하긴 마찬가지다. 1997년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을 맡아 민주노동당의 산파 구실을 했으나, 창당 뒤 많은 기간을 당내 좌파그룹에서 활동하며 대중에 얼굴 알릴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한 탓이다. 2007년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근소한 표차로 낙선했고, 2019년 치른 정의당 대표 선거에선 당권파의 지지를 받는 심상정 의원과 맞붙어 16%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1983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상공회의소에 입사해 “기업 이익을 조직하고 대변하는 일”을 했다. 1987년 대한상의 노조 설립에 참여하며 노동운동에 눈을 떴고, 1996년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을 경험한 뒤에는 정치와 정당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민주노동당의 전신 국민승리21 조직위원장을 맡았다가 산별연맹 위원장으로 복귀했고,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때는 민주노총 부위원장으로 노동계 조직화를 총괄했다.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정치연대를 거쳐 정의당까지 오는 내내 양경규의 정체성은 ‘민주 사회주의자’였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진행된 비례대표 후보자 당내 경선에서 당선권으로 평가받던 8번에 이름을 올렸으나 거대 양당이 주도한 비례 위성정당의 직격탄을 맞아 원내 입성에 실패했다. 2024년 1월 탈당한 류호정 의원의 비례대표직을 승계해 4개월 남짓 잔여임기를 채운 게 의원 생활의 전부다.
광고
지난달 권영국 전임 대표에 이어 정의당 대표직에 올랐다. 당이 어려우니 꼭 나서달라는 ‘후배 동지들’ 강권에 총대를 멨다. 한번 원내 진입에 실패한 진보정당의 대표직은 ’독이 든 성배’가 아니라 말그대로 ’독배’다. 지상 목표는 원내 재진입이다. 그러나 2028년 총선에서 다시 한번 위성정당에 참여하라는 유혹이 온다 해도 불참 노선을 뒤집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문학과 역사를 좋아한다. 젊은 시절 소설가 김승옥을 탐독했고, 역사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2022년엔 ‘이슬람주의, 와하비즘에서 탈레반까지’라는 책까지 냈다. 정치인 중에선 프랑스 사회당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조레스(1859~1914)가 롤모델이다.
광고
광고
인터뷰는 지난 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한시간반 남짓 진행됐다. 정의당의 원내 재진입 전략, 진보정치 회생 방안, 한국 정치생태계의 문제점 등에 대해 묻고 답했다.

―원내에서 원외로 밀려난 진보정당 대표를 맡게 됐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자리같다.
광고
“도약할 준비는 차근차근 하고 있다. 2024년 총선부터, 2025년 대선, 이번 지방선거까지 세 번의 전국선거에서 연달아 참패했으니, 이 정도면 당 간판을 내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1997년 국민승리21, 2000년 민주노동당 때부터 몸을 갈아넣어 진보정당 운동을 해온 지역 당원, 활동가들은 ‘어떻게 지켜온 당인데, 어떻게 여기서 포기하느냐’고 한다.”
―누군가는 ’독배’ 들지 말라고 말렸을 법도 한데.
“지역 선거에 나가 여섯번, 일곱번 떨어졌던 분들이 찾아와서 ‘어떻게든 당을 살려보자. 대표 맡을 사람이 당신 뿐이다’ 하는데, 더는 거절을 못하겠더라.”
―당내 정파 구도에 변화가 있나?
광고
“참여계(옛 유시민계)는 2024년 총선 전 탈당해 위성정당에 참여했다. 남은 건 엔엘(NL)계인 ‘인천연합’과 ‘또다른 플랜’, 좌파블록 ‘전환’, 과거 심상정 대표와 함께 했던 당권파 그룹이다.
―용혜인 사태로 위성정당 이슈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2020년, 2024년 당시로선 위성정당 참여가 불가피했다고 옹호하는 이들도 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몰각한 논리다.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를 해보자며 제도를 도입했는데, 두 거대 정당이 위성정당을 만들고, 소수정당들이 거기에 참여하면서 양당 정치가 오히려 견고해져 버렸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책임이 크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정치개혁을 후퇴시키고 ‘편법의 정치’를 초래한 위성정당에 참여해놓고, 소수정당이란 이유로 책임이 없다고 강변하는 건 참으로 남루하다.”
―당시 정의당도 위성정당 참여를 제안받았는데.
“우리가 참여했으면, 가장 좋은 조건으로 의석을 배분받았을 거다. (민주당 쪽에서) 21대 국회 때 정의당이 갖고 있던 6석은 보장하겠다고 했으니까.”
―거기 참여한 소수정당들은 ‘그렇게라도 의석을 가져왔으니 정치적 다양성이 확보된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2년간 그들이 민주당이 주도한 정책에 제대로 된 견제와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게 있나. 철저하게 민주당에 종속돼 있었다. 기업으로 치면 ‘원·하청 관계’였던 거다. 계약을 연장해 다음에도 의석을 보장받아야 하니, 원청의 심기를 어떻게든 거스르지 않아야 했을 거다. 민주당이 금융투자소득세 폐지하고, 차별금지법 제정 거부할 때 그들이 뭘 했나?”
―1년8개월 뒤 총선에서 거대 양당이 또다시 위성정당 만든다면 어쩔 셈인가?
“위성정당에 참여하면 실익이 큰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원칙을 폐기할 수는 없다.”
―존립이 위태로워질 텐데.
“그건 세이렌의 노래 같은 거다. 위성정당으로 유인하는 속삭임은 달콤하겠지만, 결과는 파멸이다. 국민이라는 돛대, 진보정치라는 돛대에 결박한 밧줄을 결코 풀 생각이 없다.”
―한번 원외로 밀려난 소수정당이 원내로 복귀한 사례는 없다.
“세계 정치사에도 흔치 않다. 그래도 드라마를 한번 써보겠다. 드라마가 드라마일 수 있는 건 기적 같은 의외성 덕분 아닌가.”

―지난 대선 때 녹색당, 노동당과 선거연합 정당 ‘녹색정의당’을 꾸려본 경험이 있다.
“이름만 바꾸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담은 당, 노동과 페미니즘과 녹색과 성소수자, 이주민 등 다양한 이들의 요구와 문제의식을 수용하고 총체적인 해법을 내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원내 재진입 전략이 뭔가?
“우선 하드웨어를 바꿔야 한다. 정의-녹색-노동의 3당 통합을 새 진보정당의 틀로 고정시키지 않겠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진보정치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 기후환경 단체들, 노동조합 등 다양한 세력이 있다. 이들 모두가 엔(n)분의1로 참여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구상하고 있다.”
―정의당도 엔분의 1만큼의 지분만 행사하겠다는 뜻인가?
“그럴 자세가 돼 있다. 과거 노회찬이 말한 ’정치판 판갈이’가 아니라 ’진보 정치판의 전면적 판갈이’를 위해선 우리가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
―민주노총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2000년 민주노동당을 만들 때처럼 민주노총을 단일한 정치 방침을 갖는 조직체로 상정하고 참여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비슷한 정치 성향을 갖는 산별연맹과 노동운동 내 현장 그룹들을 최대한 모을 생각이다.”
―소프트웨어는 뭔가?
“부유세, 무상급식, 무상보육처럼 과거 민주노동당 성장의 견인차가 됐던 의제 전략이 절실하다. 진보 연구자, 지식인들과 네트워크를 꾸려 새로운 의제를 발굴할 생각이다. 기본 방향은 서 있다. 주거·돌봄·의료·기후·빈곤 등 구체적 영역에서 지금의 ’구매력 중심 사회’를 ’권리 중심 사회’로 바꾸는 거다. 동시에 새로운 청년·세대 담론을 적극적이고 진보적으로 전유해야 한다.”
―2020년 여성·청년을 비례대표 앞 순번에 배치하는 등 공세적 젠더·세대 전략을 채택했으나 4년 뒤 결과는 처참했다.
“진보정치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기득권 세대가 만든 체제에서 저항을 꿈꾸는 청년들이다. 그들을 능력주의에 찌든 이기적 세대, 극우 논리에 오염된 위험 집단으로 낙인찍어선 곤란하다. 그들의 불만과 고통에 더 적극적으로 귀를 열어야 한다. 페미니즘 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백래쉬가 두려워 움츠러들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확산해나가야 한다.”
―선거제도는 진보정당의 생존과 성장의 핵심 변수다. 지금의 준연동형비례대표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거대 정당들이 위성정당으로 제도를 오염시키긴 했지만, 준연동형비례제는 정당 의석수를 국민 지지에 일치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탄생했다. ‘위성정당 폐지가 원천적으로 어렵다면 병립형 회귀도 논의할 수 있지 않으냐’는 의견을 당내에서 개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우리가 정치개혁의 목표로 삼았던 원칙들을 살리기 위한 다른 장치들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다른 장치들이란 게 뭔가?
“결선투표제 도입, 비례의석 확대. 이런 것들 없이 병립형 회귀를 말한다면 우리 당은 받아들이긴 어렵다.”
―새 진보정당이 모델로 삼을 만한 선례가 있나?
“한국 진보정당의 성장과 후퇴 과정은 매우 독특하다. 노동운동이 주도해 만들었다는 점에선 영국 노동당과 비슷한데, 활동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차이가 컸다. 과거 민주노동당은 재정과 인력, 운동의 기반이 노동조합이었다. 지금 그런 기반을 온전히 복원하기는 어렵다. 더 다원화된 기반을 갖는 정당으로 갈 수밖에 없다.”

―과거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들의 행적에 대해선 많은 비판들이 있었다. 자리를 찾아 민주당에 간 사람, 심지어 류호정씨처럼 우파 포퓰리스트와 손 잡은 경우도 있었다.
“개인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지만, 그분들이 그렇게 된 건 의원단과 당이 진보정치의 목표와 전망을 공유하면서 당의 기반을 확장해가는 기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짧은 원내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인가?
“그때 경험을 복기해보면, 원내정당 특성상 의원단 힘이 강하기 때문에 대표단 같은 당 기구의 통제가 안 먹혔다. 의원들이라도 팀워크가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그 안에 리더십이 없었다.”
―최근 민주당 내분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구주류와 신주류의 권력투쟁이 노선 갈등과 겹쳐 나타났다. 구주류는 검찰개혁 같은 전통 지지층에 소구하는 의제를 강조하면서 덩치를 키우자는 노선이라면, 신주류는 전통 지지 기반을 유지하면서 의제의 보수화로 중도·보수층을 흡수하는 확장 노선이었다. 두 노선이 격돌한 게 8월 전당대회였다.”
―진보정당 입장에서 민주당이 어느 노선으로 가는 게 유리한가?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회의적이다. 지지 기반과 ‘다수 연합’ 전략을 둘러싼 견해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본 관계, 시장경제, 자산 불평등, 조세·복지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두고선 신주류와 구주류의 차이가 크지 않다. 민주당 안에선 자기 정체성을 사회민주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으로 규정하는 이들도 있던데 동의할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추구하는 중도확장은 민주당의 제자리 찾아가기로 봐야하나?
“그런 면이 있다. 집권을 위해 중도로 이동하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고 우리가 막을 이유도 없다. 어찌보면 한국 사회가 보수라는 이름에 걸맞는 첫번째 정권을 맞았다고 봐야 한다. 진보가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난 거다.”
―진보정치를 위한 공간이 그만큼 넓어진 측면도 있어 보인다.
“민주당이 오른쪽으로 두 걸음 가면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가 다시 왼쪽으로 한걸음 오면 우리가 그 공간을 비워줘야 하나? 아니다. 진보정치는 확고한 자기 좌표가 있어야 한다.”
―최근 원내교섭단체 요건 완화를 놓고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신경전을 벌였다.
“두 당은 한뿌리다. 나는 조국혁신당이 진보정당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민주당과 각을 세우는 것도 합당에 앞서 자기 지분을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본다. 12석 정당의 지지율이 3%다. 국민이 그들을 독자 존립이 필요한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다. 다음 선거에서 2024년과 같은 성과를 거두기는 불가능하다는 걸 그들도 알 거다. 그러니 통합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24년 총선 당시 조국혁신당의 성공 배경에는 직전 대선 때 정의당의 독자출마가 윤석열 당선을 초래했다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감이 있다.
”2030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때는 ’내란을 반성하지도 않는 극우화된 정당에 정권을 내줘도 좋다는 것이냐’며 우리를 더 거세게 압박할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란을 반성하지도 않는데 국민의힘 지지율이 지금 수준을 유지하는 동력이 어디서 나오나? 양당 체제다. 내란 정당의 정권 획득을 막기 위해선 위성정당 창당 등 양당 체제를 강화해온 그동안의 행태에 대한 민주당의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
―유럽 좌파들은 극우의 집권을 막기 위해 보수와도 손 잡지 않나.
“한국의 정치시스템은 독일 같은 내각제, 프랑스 같은 이원집정부제가 아니다. ‘반극우 연합’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취약하단 얘기다. 극우 집권을 막기 위해 우리한테 양보하라는 건 공포 마케팅, 협박정치다.”
―다당제 옹호는 진보정당의 생존을 위해서인가, 다당제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인가?
“다원화된 사회에서 정치가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려면 다당제가 필수다. 물론 진보정당의 생존을 위해 다당제가 절실한 것도 사실이다. 핵심은 진보정당이 성장해야 다당제 자체가 갖는 긍정성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