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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October 26, 2026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 고추, 돌아가는 길의 깊은 매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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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말리기

[연합뉴스 자료사진]

고추는 작지만, 맛의 판도를 바꾼다. 한 조각만 넣어도 국물 맛이 달라지고, 고춧가루 한 숟가락이면 밥상 빛깔이 붉게 변한다. 김치와 고추장, 찌개와 나물까지 고추 없는 한국 밥상은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나 이 열매가 우리 음식에 본격적으로 쓰인 역사는 300년 안팎이다.

◇ 바다 건너온 열매, 조선의 밥상에 앉기까지

고추의 고향은 중남미다. 멕시코 일대에서 수천 년 전부터 재배됐고,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유럽 상인들의 뱃길을 타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퍼졌다. 대항해시대가 낳은 대표적인 '세계화 작물'인 셈이다.

한반도 전래를 알려주는 가장 이른 기록은 이수광이 1614년 펴낸 '지봉유설'이다. 이수광은 남만초(南蠻椒)가 독이 강하며 왜국에서 처음 들어와 세간에서 '왜개자'(倭芥子)라 부른다고 적었다. 임진왜란 전후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는 통설은 이 기록에서 나왔다.

2010년 무렵에는 조선 전기 문헌의 '초'(椒) 기록을 근거로 고추가 그보다 먼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재배 고추의 기원을 중남미로 보는 유전체 연구가 이어지면서 이 주장은 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일본을 거쳤는지 중국을 거쳤는지 등 구체적인 경로를 두고는 지금도 견해가 엇갈린다.

낯선 열매가 곧바로 밥상의 주인이 되지는 않았다. '지봉유설' 이후에도 17세기 조리서에서 고추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18세기다. 1720년대 무렵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소문사설'에 고추를 넣은 김치와 고추장 만드는 법이 실렸고, 1766년 유중림이 펴낸 '증보산림경제'는 고추장을 '만초장'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오이김치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는 법을 기록했다. 우리 조상은 이국의 작물을 기후와 농사, 저장 방식, 입맛에 맞춰 한 세기 넘게 길들인 끝에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의 김치는 채소를 소금이나 장에 절여 익힌 음식이었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순무를 장에 담가 여름에 먹고 소금에 절여 겨울 반찬으로 삼는다는 시를 남겼다. 고추가 더해지면서 김치는 빛깔과 맛이 모두 바뀌었다. 매운맛이 젓갈의 비린내를 눌러주면서 젓갈을 넉넉히 쓰는 김치가 늘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많다.

19세기 후반 속이 꽉 차는 통배추가 널리 재배되면서 오늘날 익숙한 붉은 배추김치가 자리를 잡았다. 고춧가루는 국과 찌개, 나물은 물론 생선조림과 고기 양념에도 두루 쓰이게 됐다.

고추장은 오래된 콩 발효 기술에 새 재료가 결합해 태어난 장이다. 메주와 곡물이 발효하며 만든 구수한 단맛에 고추의 향과 매운맛이 어우러져 한국 음식만의 풍미를 낸다. 18세기 말 연암 박지원은 손수 담근 고추장을 아들에게 보내면서 맛이 어떤지 자세히 알려달라고 편지에 적었다. 19세기 무렵에는 순창 고추장이 이름난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다.

김장철이면 집마다 고추를 말리고 빻아 배추와 무에 버무렸다. 겨우내 먹을 음식을 장만하려고 가족과 이웃이 품앗이로 힘을 모았다. 이 풍경은 2013년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올랐다. 등재 명칭에 '나누는 문화'가 들어간 까닭은 김장의 중심에 함께 일하고 나누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추는 민속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옛사람들은 붉은색을 태양과 불의 기운으로 여겨 나쁜 기운을 쫓는 색으로 믿었다. 장을 담근 뒤에는 새끼줄에 붉은 고추와 숯을 꿰어 장독에 둘렀고, 아들이 태어나면 대문에 건 금줄에 고추와 숯을 끼웠다. 딸이면 고추 대신 솔가지를 달았다. 과학적 방역법이라기보다 귀한 음식과 새 생명을 지키려던 바람을 담은 풍속이다.

매운맛은 노래에도 남았다. 경북 경산 지역에 전하는 시집살이 노래에는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라는 대목이 있다. '당추'는 고추를 달리 부르던 말이다. 혀끝의 매운맛을 시집살이의 고단함에 빗댄 이 노랫말에서 고추는 우리네 희로애락을 담는 말이 됐다.

◇ 매운맛의 정체

전통 약선에서 고추는 맛이 맵고 성질이 뜨거운 식재료로 분류된다. 몸을 덥히고 찬 기운을 흩으며 식욕을 돋우는 데 써왔다. 다만 이런 전통적 설명을 현대 의학의 치료 효과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현대 과학이 밝힌 고추의 모습도 흥미롭다. 고추는 비타민C가 풍부한 채소로 꼽힌다. 1930년대 헝가리 과학자 센트죄르지 얼베르트는 고향 세게드의 파프리카에서 비타민C를 대량으로 추출해 연구를 진척시켰고, 193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붉은 고추의 빛깔은 캡산틴 같은 카로티노이드 색소에서 나오며, 이 가운데 베타카로틴 등 일부는 몸속에서 비타민A로 바뀐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은 혀의 미각 세포보다 열과 통증을 감지하는 신경 수용체에 작용한다. 매운맛이 맛보다 '뜨거운 통증'에 가까운 이유다. 미국 생리학자 데이비드 줄리어스 연구팀은 1997년 캡사이신을 이용해 이 수용체(TRPV1)를 찾아냈고, 이 공로로 줄리어스는 202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고추의 매운 정도를 재는 '스코빌 지수'는 1912년 미국 약사 윌버 스코빌이 고안했다.

적당한 고추는 음식의 풍미를 살리지만, 많이 먹는다고 건강 효과가 커지지는 않는다. 위염이나 위식도역류질환이 있는 사람은 매운 자극이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어 양을 조절해야 한다. 고추와 함께 따라오는 소금도 살펴야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국민건강영양조사를 분석한 결과 2023년 우리 국민의 하루 평균 나트륨 섭취량은 3천136㎎으로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2천㎎)의 1.6배였다. 섭취원 가운데 김치류는 면·만두류 다음으로 많았다. 김치와 고추장, 고추지처럼 소금이 들어가는 음식은 양을 가늠해 먹어야 한다.

양생의 지혜를 밥상에 옮긴다면 핵심은 조화와 절제다. 노자는 '도덕경' 12장에서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한다"(五味令人口爽)고 했다. 자극이 강할수록 혀는 더 센 맛을 찾는다는 경고로 읽힌다. 고추를 즐기되 몸의 반응을 살피고, 채소와 곡물, 콩과 생선을 고르게 먹어야 한다. 저속노화의 밥상은 특별한 식품 하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매일 균형 잡힌 식사를 이어가는 데서 시작한다.

◇ 손자병법으로 본 고추 요리

손자병법 군쟁편(軍爭篇)은 "군쟁의 어려움은 돌아가는 길을 곧은 길로 삼고, 불리함을 이로움으로 바꾸는 데 있다"(軍爭之難者 以迂爲直 以患爲利)고 말한다. 손자는 이어 길을 일부러 돌아가며 적을 이익으로 꾀어내면 남보다 늦게 떠나도 먼저 닿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우직지계'(迂直之計)를 먼저 아는 쪽이 이긴다고 못 박았다.

갓 딴 풋고추는 싱그러운 향과 매운맛을 그대로 전한다. 볕에 말리면 고춧가루가 돼 다음 해까지 쓰이고, 배추와 무를 만나면 김치가 된다. 메주와 함께 발효의 시간을 거치면 고추장이 되고, 기름에 지지면 고추전이 되며, 간장이나 소금물에 삭히면 오래 두고 먹는 고추지가 된다. 같은 열매가 손질과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맛으로 거듭난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고추를 말리고, 섞고, 익히고, 기다리는 일은 얼핏 먼 길을 도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제철이 지난 겨울에도 고추를 먹고, 새로운 맛까지 얻는다. 눈앞의 편리함보다 다음 계절의 밥상을 준비하는 것, 고추가 보여주는 '이우위직'의 지혜다.

군쟁편은 서두름의 대가도 분명히 적었다. 갑옷을 걷어들고 밤낮없이 백 리를 달려 이익을 다투면 삼군의 장수가 모두 사로잡히고, 튼튼한 병사는 앞서고 지친 병사는 처져 열에 하나만 도착한다는 것이다. 목적지만 보고 내달리다 정작 싸워야 할 때 힘이 남지 않는 군대를 경계한 대목이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발효를 재촉한다고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 알맞은 준비와 시간이 있어야 제맛이 든다.

같은 군쟁편에는 군대의 움직임을 자연에 빗댄 유명한 구절도 있다. "빠를 때는 바람처럼, 느릴 때는 숲처럼, 적을 칠 때는 불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일본 전국시대 무장 다케다 신겐이 이 구절을 군기에 새기면서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 상황에 따라 속도와 강약을 달리하라는 가르침이다.

고추의 쓰임도 이와 닮았다. 생고추는 신선한 향을 살릴 때, 고춧가루는 색과 매운맛을 더할 때 쓴다. 김치와 고추장은 발효를 거치며 맛이 깊어지고, 고추전은 불을 만나 순해진다. 고추지는 저장 음식으로 제 몫을 한다. 모든 음식에 같은 양의 고추를 넣지 않듯 삶에서도 언제 힘을 보태고 언제 멈출지 살펴야 한다.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재료와 상황에 맞게 힘을 써야 한다.

노자의 자연관도 이와 맞닿아 있다. 노자는 '도덕경' 60장에서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을 익히는 것과 같다"(治大國若烹小鮮)고 했다. 작은 생선을 자주 뒤집으면 살이 부서지듯 지나친 손길이 일을 그르친다는 뜻이다. 씨앗이 싹을 틔워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하듯 음식도 재료의 성질에 맞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앞당기기보다 자연의 흐름을 살피며 필요한 만큼만 손을 보태는 것, 이것이 밥상에서 실천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지혜다.

저속노화의 밥상도 빠른 효과를 좇지 않는다. 매일의 식사를 고르게 하고, 신맛·쓴맛·단맛·매운맛·짠맛의 오미(五味)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살피며, 제철 재료를 다양하게 먹는 작은 습관이 쌓여 내일의 건강이 된다.

고추 한 알은 작지만 그 안에 긴 시간이 담겨 있다. 바로 먹을 수도 있고, 말려 다음 계절을 준비할 수도 있으며, 발효시켜 더 깊은 맛을 낼 수도 있다. 돌아가는 길을 낭비로 여기지 않고, 기다림을 손해로 여기지 않으며, 때에 맞게 힘을 쓰는 것. 고추가 김치가 되고 고추장이 되는 과정에는 우리 음식의 지혜와 군쟁편의 가르침이 함께 살아 있다.

이처럼 매운맛은 혀끝에서 시작되지만, 삶의 지혜는 절제와 기다림 속에서 깊어진다. 서두르지 않아도 좋다. 때에 맞게 변하고, 오늘의 수고로 내일의 밥상을 준비하는 사람은 오래도록 자기 길을 지켜갈 수 있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0월26일 09시16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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