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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27, 2026

감사의 정원에 깃든 재조지은의 그림자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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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6월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감사의 정원에서 열린 ‘6·25 전쟁 76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6월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감사의 정원에서 열린 ‘6·25 전쟁 76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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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수 |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광화문광장에 우뚝 서 있는 23개의 조형물이 오늘 밤에도 빛을 쏘아 올리고 있다. 한국전쟁에 병력 및 의료진을 파견한 22개국과 당사자인 한국을 상징하는 이 기둥형 조형물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페이스북에 쓴 대로 ‘받들어총’ 형상이다. 누구를 향한 받들어총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다못해 청와대를 향한 것도 아니다. 23개의 기둥은 길 건너 미국대사관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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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정원’이라는 제목에 끌려서 왔던 사람들도 이 받들어총 형상을 보면 단순히 감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당혹스러워진다. 외국 사람에게 설명하기 힘든 이 낯 뜨거운 충성심은 실은 정치적 기획의 산물이다. 지난 6월3일 지방선거에 맞춰 기획된 보수표 결집용 이벤트인 것이다. 오 시장은 6월2일 밤 마지막 선거운동을 기어이 이 감사의 정원 앞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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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외국을 끌어들이는 행태는 선조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난 선조는 명나라에 원군을 청했고, 명군의 힘을 빌려 왜군을 몰아낸 뒤에 이 나라를 다시 살린 은혜가 명나라에 있다며 재조지은이란 말로 감사를 표했다. 명나라의 파병이 왜군을 무찌르는 데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선조가 누누이 강조한 이유는 조선군의 활약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지휘하거나 조직하지 않은 조선 수군이나 의병의 전과는 축소하고 자신이 모셔온 명나라의 전과는 확대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 뒤 공신을 책봉할 때 이순신 등 결정적인 무공을 세운 신하보다 자기를 호위하여 피난을 다녀온 신하들에게 더 높은 등급과 더 후한 포상을 내렸다.

이렇게 선조가 정치적 이유로 강조했던 재조지은은 선조 이후에는 그냥 관념적인 습관이 되어 이어졌다.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무려 고종에 이르기까지 재조지은을 기리는 대보단에서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낸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치르고서야 폐지된 대보단 제사는 명나라보다 오래갔고, 심지어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가 쇠락할 때까지 지속됐다. 청나라가 멀쩡히 서 있는 마당에 명나라의 재조지은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는 것은 정치적 이익 때문도 아니고, 순전히 관념적 습관이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우리가 명나라에 맹목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동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개항시켰고, 미국의 흑선은 일본을 개항시켰으며, 일본은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하여 서구의 문물을 배워왔다. 이러한 격변기에 국가의 근대화를 기획했어야 할 조선의 조정은 재조지은을 붙잡고 꿈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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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은 과연 감사의 정원을 세워서 미국을 비롯한 22개 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때인가. 22개국을 새삼스레 살펴보자. 미국,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타이,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룩셈부르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이탈리아, 서독.

이들과 2025년 우리의 주요 교역국을 비교해보자. 중국(20%), 미국(15%), 베트남(7%), 대만(6%), 일본(6%), 오스트레일리아(3%), 홍콩(3%). 우리는 전쟁 때 우리를 도와줬던 나라들보다 그러지 않았던 나라들과 더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다. 2025년 유학생 분포를 보자. 중국(30%), 베트남(21%), 우즈베키스탄(6%), 몽골(6%), 네팔(5%). 우리나라에 배우러 오는 나라는 전쟁 때 우리를 도와줬던 나라들이 아니다. 2025년 관광객 분포를 보자. 중국(29%), 일본(19%), 대만(10%), 미국(8%), 홍콩(3%), 필리핀(3%), 베트남(3%). 우리나라에 놀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와줬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어떤 국제관계 분포를 봐도 22개국이 오늘날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한때 우리의 적이었던 나라들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미 현실은 그렇게 바뀌었는데 우리의 관념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계산으로 탄생했다가 관념적 습관으로 굳어졌던 재조지은의 그림자가 감사의 정원에 어둡게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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