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에 필요한 ‘데이터의 계보’, 정밀 처방 길 연다
채성욱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
‘팔란티어’는 서로 다른 시스템에 흩어진 데이터를 연결·분석해 복잡한 상황에서 필요한 판단을 돕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HD현대가 이를 조선 현장에 적용한 사례가 있다. 자재 관리와 재무 계획, 기계 설비 등 서로 다른 데이터 소스를 하나의 체계에서 연결해 복잡한 조선 공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핵심은 새로운 기계를 들이는 데 있지 않았다. 부서마다 다르게 관리하던 대상에 공통된 정의를 부여하고, 각각의 속성과 관계를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현실의 사물과 개념, 그 관계를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정의한 체계를 ‘온톨로지’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를 한약에 옮겨 보면 더 복잡하다. 같은 ‘당귀’라도 산지와 재배 환경, 수확 시기, 건조와 가공 방법 등에 따라 성분 구성이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추출 시간과 온도 같은 조제 조건까지 더해지면 같은 이름의 한약에도 일정한 편차가 생긴다.
약전 등에서는 기원과 성상, 지표 성분 함량 등의 품질 기준을 두어 한약재의 안전성과 일정한 품질을 관리한다. 다만 앞으로는 적합·부적합 판정을 넘어 품질관리 과정에서 얻은 정량적 측정값과 생산·가공 정보를 더욱 적극적으로 축적하고 연결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어떤 특성을 가진 약재였는가’까지 남긴다면 한약의 품질을 더 높은 해상도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소는 강판의 강도를 재고 나서 합격이라고만 적지 않는다. 숫자를 남긴다. 한약은 여러 약재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원료 단계의 정보가 조제 이후까지 이어지기 어렵다. 환자의 치료 결과는 기록되지만, 사용된 약재의 산지나 생산·가공 조건까지 연결해 추적하기는 쉽지 않다. 같은 처방의 연구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때도 그 차이가 연구 조건 때문인지, 원료 특성 때문인지 정밀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해법의 아이디어는 팔란티어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한약마다 고유 번호를 붙여 산지와 수확 연도, 손질 방법을 연결한다. 둘째, 합격 여부뿐 아니라 측정한 숫자 자체를 남긴다. 셋째, 성분 분석에서 얻은 프로파일도 함께 축적한다. 현재 품질 기준에는 일부 지표 성분이 주로 활용되지만, 이후 새로운 중요 성분이 밝혀지면 축적된 자료를 다시 해석할 수 있다. 넷째, 생성한 번호를 처방과 환자 기록까지 이어 붙인다.
이 네 가지가 갖춰지면 질문의 해상도가 달라진다. “한약이 효과가 있는가”에서 “어떤 조건에서 생산된 한약이 어떤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가”로 좁혀진다. 기존 연구에 이런 데이터가 더해지면 더 정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한약의 표준화는 모든 약재를 똑같이 만드는 일이 아니다. 땅에서 자라는 약재를 공산품처럼 완전히 균일하게 만들 수는 없다. 공장도 부품의 편차를 없애기보다 허용 범위를 정한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계보를 갖는 일이다. 이런 기록이 쌓이면 어떤 차이가 환자의 신체 결과와 관련 있는지 확인하고, 현재의 품질 지표도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다. 효과가 제한적인 조건이나 처방이 확인될 수도 있다. 데이터를 쌓는 일의 본질은 옳음을 증명하는 데만 있지 않다. 무엇이 맞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찾아내는 데 있다. 그것이 인공지능(AI)이 필요로 하는 양질의 데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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