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안보 시대, 기술주권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 [율촌 기술안보리포트]

최근 연구안보(Research Security)가 국가안보와 산업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정책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과거 연구안보는 일부 국가핵심기술이나 방산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제한적인 개념으로 인식됐지만, 이제는 대학·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기업부설연구소를 포함한 국가 연구개발 생태계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국제공동연구 확대와 첨단기술 패권경쟁의 심화가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기술, 첨단바이오, 우주, 배터리 분야에서는 연구성과 자체가 국가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연구실에서 생산되는 데이터와 논문, 알고리즘, 시제품이 곧 국가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연구성과가 글로벌 협력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유출되거나 해외 기관에 이전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국은 이미 국가안보 차원
실제로 미국은 최근 수년간 대학 연구실과 국가연구소를 대상으로 한 기술유출 문제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대응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과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 지침 등을 통해 연구안보 프로그램 구축을 강화하고 있으며, 연방 연구비를 지원받는 기관을 대상으로 연구안보 책임체계와 신고의무를 확대하고 있다. 영국도 신뢰연구(Trusted Research) 정책을 통해 대학과 연구기관이 해외 협력기관에 대한 사전 위험평가(Due Diligence)를 실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호주와 캐나다 역시 연구안보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전략기술 분야의 국제협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한국 역시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최근 수년간 국가핵심기술 유출 사건의 상당수가 대학과 연구기관을 경유해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반도체, OLED, 배터리, 바이오 분야에서 해외 경쟁국으로의 기술 유출 사례가 지속적으로 적발되고 있다. 또한 북한과 중국 등 국가 배후 해킹조직이 대학과 연구기관을 대상으로 연구자료 탈취를 시도한 사례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대학은 개방성과 국제성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특성상 정부기관이나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안통제가 느슨하고 연구데이터 관리체계가 취약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이 연구안보의 사각지대로 지적돼 왔다.
8개 대학 전담조직 지원 나서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최근 발표한 ‘연구안보 역량강화 지원사업’은 매우 시의적절한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정부는 서울대, 연세대, 포항공대 등 8개 대학을 대상으로 연구안보 전담조직 설치를 지원하고, 국제공동연구 위험관리, 외국인 연구인력 관리, 연구자산 보호체계를 구축하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중앙대와 KAIST를 연구안보센터로 지정하고, 글로벌 연구안보 정책지원센터를 운영하는 등 국가 차원의 연구안보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정책의 가장 큰 의의는 연구안보를 단순한 기술유출 방지 차원이 아니라 연구자와 연구기관을 보호하기 위한 관리체계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연구현장에서는 연구안보를 규제나 제약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선진국 사례를 보면 연구안보는 국제협력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안전한 연구협력을 지원하기 위한 예방적 관리체계에 가깝다. 연구자가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적절한 절차를 거쳐 협력하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다.
출연연·기업연구소까지 넓혀야
이번 정책에도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존재한다. 무엇보다 현재 사업의 적용 범위가 일부 대학에 국한돼 있다. 실제 기술유출 위험은 대학뿐만 아니라 출연연, 전문생산기술연구소, 기업부설연구소 등 다양한 연구기관에서 발생할 수 있다. 향후에는 국가연구개발사업 참여기관 전체를 포괄하는 연구안보 체계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또 연구안보와 사이버보안 간 연계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최근 연구자료 유출은 물리적 반출보다는 해킹, 클라우드 계정 탈취, 이메일 공격, 생성형 AI 악용 등 사이버 공격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연구안보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제로트러스트(Zero Trust), 데이터보안, AI 기반 이상행위 탐지, 연구망 보안 강화 등 정보보호 체계와의 통합이 필수적이다.
향후에는 연구안보 전담책임자 제도 도입, 국제공동연구 위험평가 의무화, 국가 연구안보 인증체계 구축, 연구데이터 분류·관리 기준 마련 등 보다 체계적인 제도 정비가 요구된다. 아울러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과 인식개선 활동도 병행돼야 한다. 아무리 우수한 제도가 있어도 연구현장의 공감과 참여가 없다면 형식적인 절차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안보는 연구의 개방성과 국가안보가 충돌하는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개방형 혁신이 지속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안전장치다.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시대에 연구안보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도한 규제가 아니라 연구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국가 핵심기술과 연구자산을 보호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연구안보 체계의 구축이다. 이번 정책이 대한민국 연구생태계의 경쟁력과 기술주권을 지키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율촌 기술안보리포트]에서는 율촌 기술수출입통제대응센터 구성원들이 국가핵심 및 첨단전략기술의 수출 승인·신고, 기술 보유기관 인수·합병 등 기업 기술규제 리스크에 대한 혜안을 제시합니다. 윤오준 고문은 전 국가정보원 3차장으로 사이버, 우주, 통신 등 신기술 분야 안보관련 정보수집과 대응활동을 담당했고, 현재 중앙대학교 보안대학원 특임교수, 한국정보보호학회 협력부회장, 한국정보보호최고책임자(CISO)협의회 고문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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