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극물 산소는 어떻게 에너지가 됐나…‘산소와 진화’를 읽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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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함께 꽂아두면 폼나는 책
뿌리와이파리 출판사의 ‘오파비니아’ 시리즈는 한국의 진화 교양서 역사에서 따로 한 자리를 내줄 만하다. 2007년 ‘생명 최초의 30억년’으로 시작해 19년 동안 진화라는 한 주제를 붙들고 책을 냈다. 화석과 대멸종, 네안데르탈인과 미토콘드리아, 공룡과 산소, 세포와 기생생물까지 범위는 넓었지만 질문은 한결같았다. “생명은 어떻게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가?” 유행을 좇기보다 좋은 과학책을 골라 번역하며 시리즈의 결을 지켰다. 그렇게 쌓인 책이 어느새 스물여섯권이다. 한국 독자가 진화를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이야기’보다 훨씬 크고 깊은 역사로 받아들이는 데 이 시리즈가 한몫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파비니아의 공로는 진화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데만 있지 않다. 오히려 묵직하고 진지하다. 이 시리즈의 책들은 독자를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는다. 가설이 맞부딪치면 논쟁을 보여주고, 화석과 분자생물학, 지질학과 생화학이 다른 증거를 내놓으면 그 차이도 감추지 않는다. 진화를 이미 정해진 답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의 역사로 만들지도 않는다. 우연과 환경 변화, 생물의 활동이 뒤엉켜 오늘의 생명 세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러 분야의 언어로 보여준다. 대중과학서의 수준을 낮추지 않고 독자의 눈높이를 높이는 쪽을 택해온 셈이다. 과학의 대중화보다는 대중의 과학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시리즈는 하나의 출판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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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물여섯번째 책에서 마침내 한국인 저자가 등장했다. 아주대학교 약학대학 김홍표 교수의 ‘산소와 포도당, 그리고 물질대사의 신기원’이다. 김홍표는 생명현상을 분자와 세포의 언어로 연구해온 약학자이면서 신문 칼럼과 여러 과학책을 통해 복잡한 생명과학을 일상의 언어로 옮겨온 저자다. 지난 19년 동안 외국의 중요한 진화서를 소개해온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축적 위에서 한국 연구자가 직접 진화의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 각별하다. 시리즈의 독자가 자라 마침내 같은 서가에 저자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책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산소와 포도당이다. 우리는 흔히 들이마신 산소가 몸속에서 이산화탄소가 되어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대사는 그렇게 단순한 맞교환이 아니다. 음식물에서 떼어낸 전자와 수소가 여러 반응을 거쳐 이동하고 산소는 그 긴 흐름의 마지막에서 전자를 받아 물이 된다. 김홍표는 이 과정을 호흡이라는 익숙한 말 대신 ‘전자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여준다. 왜 수많은 유기물 가운데 포도당이 생명의 보편적인 연료가 되었는지, 한때 생명에게 독극물이었던 산소가 어떻게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내는 도구가 되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물질대사는 반응식의 묶음이 아니라 지구 생명의 역사로 보이기 시작한다. 생화학 교과서에서 서로 떨어져 있던 해당 과정(포도당 깨기), 시트르산회로, 전자전달계가 한편의 진화사로 이어지는 대목이 이 책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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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파비니아 시리즈에서 이 밖에도 산소를 중심에 놓고 함께 읽을 책이 세권 더 있다. 피터 워드의 ‘진화의 키, 산소 농도’는 시선을 세포 밖으로 돌려 대기 전체를 본다. 오늘날 대기의 산소는 약 21퍼센트지만 이 숫자는 지구 역사 내내 일정하지 않았다. 산소 농도는 오르내렸고, 그 변화는 동물이 쓸 수 있는 에너지와 호흡 방식, 몸집과 활동성에 제약을 주었다. 워드는 캄브리아기 이후 동물의 진화와 대멸종을 산소 농도의 역사와 나란히 놓는다. 산소 하나로 진화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진화를 유전자만의 사건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지만, 그 환경의 화학적 조건 자체가 진화가 갈 수 있는 길을 열고 닫는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적자생존’이라는 말보다 먼저 “무엇에 적합해야 했는가”를 묻게 된다.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를 그다음에 꽂으면 산소를 다루는 일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가 보인다. 미토콘드리아는 오래전 다른 세포 안으로 들어간 박테리아의 후손이다. 그 공생이 진핵세포에 막대한 에너지 생산 능력을 제공했고 복잡한 세포와 다세포 생명의 가능성을 넓혔다. 우리는 미토콘드리아를 흔히 ‘세포의 발전소’라고 외우지만 레인은 그 비유를 훨씬 넘어간다. 에너지 생산에서 출발해 성과 생식, 세포 자살과 노화까지 미토콘드리아의 흔적을 추적한다. 산소를 이용해 에너지를 얻는 능력은 단순히 효율 좋은 대사법 하나를 얻은 사건이 아니라 복잡한 생명의 조건을 바꾼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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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닉 레인의 ‘산소: 세상을 만든 분자’는 이 이야기의 밝은 면만 보고 끝내지 못하게 한다. 산소는 강력한 전자수용체이기에 많은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지만 바로 그 성질 때문에 위험하다. 산소를 다루는 과정에서는 반응성이 큰 산소화합물이 생기고 이것이 단백질과 지질, 디엔에이(DNA)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생명은 산소 덕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산소가 만드는 손상을 수선하고 통제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역설을 따라가면 진화는 완벽한 설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위험한 조건을 견디고 이용하는 임시방편의 역사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산소를 이해하려면 이 두 얼굴을 함께 보아야 한다.
네권을 함께 읽으면 산소는 더 이상 숨 쉴 때 들이마시는 기체가 아니다. 지구를 바꾸고 생명의 대사를 바꾸며 복잡한 세포의 탄생을 도왔고 동시에 노화와 죽음의 조건에도 깊이 관여한 진화의 물질이다. 이번에는 산소라는 한 주제로 네권을 골랐지만 ‘함께 꽂아두면 폼나는 책’이라는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오파비니아 시리즈 전체인지도 모르겠다. 스물여섯권을 한 줄로 꽂아두면 뿌듯하다. 보기 좋아서만은 아니다. 그 책등 사이에 19년 동안 한국 독자들이 조금씩 넓혀온 진화의 시야가 함께 꽂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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