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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September 28, 2026

언론인들끼리 논쟁하면 안 되나 [강준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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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미디어. 게티이미지뱅크
언론, 미디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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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 전북대 명예교수

“이제 언론은 논쟁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아예 경멸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색깔이 다른 언론사들 간 최소한의 소통마저 단절된 가운데 각자 자기 팬덤에 충실한 정보와 주장만 공급하기에 바쁘다. 한땐 색깔이 다른 신문과 사설을 교환해 싣는 등 소통하려는 자세는 있었건만, 이젠 그마저 사라져버렸다… 어떤 식으로건 상호 소통하는 채널을 만들지 않은 채 각자 광야에 선 선지자들처럼 확신에 찬 고함만 외쳐대는 건 나라를 두개로 찢는 민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년 전 이 지면에 쓴 칼럼에서 한 말이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지난 3년간 악화된 ‘논쟁 경멸’의 풍토 때문인가. 현 상황에선 세인의 비웃음을 사기에 족할 정도로 순진한 주장이 돼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디지털 혁명이 만든 새로운 틀이 언론을 ‘팬덤 장사’로 바꾸려고 드는데, 개별 언론사가 무슨 수로 그 틀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언론인이 개인적으로 팬덤의 치어리더 역할을 거부하고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기사를 쓰면 어김없이 팬덤의 악성 댓글이 쏟아지곤 한다. 걸핏하면 불매운동까지 외치고 나서는데, 무슨 수로 ‘왕’을 자처하는 그런 ‘소비자’와 논쟁할 수 있겠는가. ‘본능의 경제학’이라는 책은 논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그런 소비자들의 본능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의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지 마라. 그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들을 더 많이 보여달라. 우리를 결집시킬 내용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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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그런 요구에 순응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사회 전체를 생각할 것도 없이 언론사만의 생존과 성장엔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절대복종인들 못 하랴. 그런데 그게 그렇질 않으니 문제다. 이 점에선 언론은 정당과 비슷하다. 강성 팬덤이 좌지우지하는 정당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일시적으론 그럴 수 있어도 종국엔 몰락의 길로 가기 마련이다. 언론이건 정당이건 가장 중요한 건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논쟁을 회피하거나 경멸하는 언론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진리는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샘솟는다”(데이비드 흄)거나 “논쟁은 생각하는 데 있어 최고의 촉매제이다”(이반 파블로프)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그렇다. 일상적으로 작은 사실이나 진실의 탐구에 매달리는 언론이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는 논쟁이라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건 오직 이미 정해진 길로 내달리는 ‘주창 저널리즘’만 하겠다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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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에 대한 오해가 만만치 않다. 개인 차원과 사회 차원을 구분하지 않는 바람에 생겨난 오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품성이 원래 사악하기 때문에 논쟁을 통해 옳고 그름을 가릴 수는 없다는 ‘논쟁 무용론’을 펼쳤다. 모두 다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이기느냐 지느냐에 매달리기 때문에 얻을 게 없다는 것이다. 처세술 전문가 데일 카네기는 이긴다 해도 상대의 호의는 절대로 얻을 수 없으니 “방울뱀이나 지진을 피하듯이 논쟁을 피하라”고 했다.

개인의 입장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 보자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정책이나 주장의 허점과 부작용을 깨닫는 데에 논쟁만 한 것이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논쟁의 이런 순기능을 가로막는 게 바로 논쟁이라는 단어의 오남용이다. 지금 우리는 이미 정해진 답을 갖고 달려드는 정치진영 간 패싸움을 가리켜 논쟁이라고 부름으로써 논쟁에 대해 염증만 내게 만들고 있잖는가. 진영 간 패싸움은 언론 분야에서도 암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바, 언론이 논쟁을 제도화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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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우리가 논쟁에 대해 말할 때 승패를 가리는 전쟁처럼 말한다고 지적하면서 논쟁을 춤으로 바라보는 문화를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꿈같은 이야기라고 비웃지는 말자. 언론이 우선 언론인들 간 정중한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논쟁 문화를 만드는 데에 적극 기여해주면 좋겠다. 논쟁을 위한 지면을 따로 만들어 구체적인 민생 문제 중심의 논쟁을 해보자. 최근 뜨거운 현안인 부동산·주식·인사 문제도 언론이 참여한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었더라면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게 제도로 정착되기까진 언론이 논쟁 참여자들을 직접 섭외하면서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 중요한 건 논쟁의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독자들이 그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흥미성과 유익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라랴. 소통을 위한 논쟁을 꿈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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