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사진신부, 독립운동…먼 곳에서 온 이야기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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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하와이 사진신부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즈음 문양목 선생이 돌아온다는 뉴스를 봤다. 120년 만의 귀환이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묻혀 있던 선생의 유해가 돌아온다니. 내가 쓰고 있던 책의 주요 인물이었기에 울컥, 마음이 출렁였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하와이로 떠났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던 이,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살았던 그가 돌아오는구나 이 산하로 다시. 문득 이찬성 여사도 같이 올까? 찾아보니 그도 함께 돌아오는 듯했다. 이찬성은 문양목의 부인이다. 첫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하와이에서 선생은 이찬성 여사와 결혼했다. 평안도에 살던 이찬성은 비행기도 없던 시절 신랑 될 이 사진 한장 들고 태평양을 건넜다. 스무살 언저리 처자의 담대한, 고독한, 결단이었다. 사진신부, 라고 이들은 불렸다.
사진신부는 1910~1920년대에 미주 지역의 한인 남성들이 한국의 여성들과 사진을 교환하여 혼인한 중매결혼을 말한다. 이 중매로 천여명의 여성이 하와이로 건너갔다. 이찬성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텔레비전도 비행기도 없던 시절이니 하와이는 몇가지 정보로만 상상할 수 있는 미지의 땅이었다. 용감하거나 무모하지 않다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을 감행한 여자들, 바다 건너 먼먼 곳으로 떠났던 여자들의 이야기는 경이롭고 역동적이고 가슴 시리고 무엇보다 간단치 않다. 가난과 억압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꿈과 야망에 관한 서사이며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역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이 어떻게 전지구적인 서사와 연결되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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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가면 여자도 공부할 수 있다, 여자도 돈을 벌 수 있다, 라는 매파의 이야기가 당시 사진신부로 갈 결심을 한 여자들의 가장 강렬한 욕망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은 학교도 갈 수 없었고 직장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사탕수수 노동자의 아내로 고단하고 힘겹게 삶을 꾸려야 했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사는 이들의 도착과 함께 반들반들 윤이 난다. 이찬성을 비롯한 사진신부들은 서로서로 돕고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계를 부어 목돈을 마련하고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길러냈다. 그들의 딸들은 웬만해선 다 학교를 다녔고 고등교육을 받았다. 알뜰살뜰 돈을 불려 호텔과 식당의 주인이 되기도 했다.
여자들이 살림과 돈 버는 일만 한 건 아니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은 하와이에 사는 한인들을 일파만파 뒤흔들었다. 호놀룰루를 비롯하여 마우이 카우아이 빅아일랜드 등 네개 섬의 부인 대표는 호놀룰루에서 회집하여 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하고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하였다. 대한부인구제회는 3·1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들에게 천오백달러를 보내고, 돈을 더 보태 팔백달러를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재정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 건 하와이와 미주 지역 한인 동포들이 보낸 돈이었다. 사진신부들의 피 땀 눈물이 다시 태평양을 건너 상하이에 한반도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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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에 다녀왔다. 문양목 선생과 이찬성 여사를 뵈러. 대전역에 내려 시장에 들렀다. 추석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시장은 흥성스러웠다. 송편과 햇과일을 골랐다. 여름 햇빛을 양껏 머금은 사과와 배와 감이 튼실했다. 솔잎을 넣고 찐 말랑하고 쫀득한 송편을 사니 어쩐지 마음이 흐뭇했다. 식혜도 샀다. 그런 것들이, 그리웠으리라, 아마도. 지치고 고단하고 서럽고 아픈 날 유독 생각났을 고국의 음식들. 지하철을 타고 현충원역에서 내리니 홍범도장군로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오고 현충원역에서 국립현충원까지의 2킬로미터를 홍범도장군로라고 지정했다고 한다. 그 길을 따라 현충원에 도착하니, 오, 묘비의 바다, 가 펼쳐졌다. 넓고 넓은 대지에 수천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가야 하나, 지도를 살펴보는데 국외유해봉환독립유공자 묘역이 따로 있었다. 소방공무원 및 의사상자 묘역 옆이었는데 기존 독립유공자 묘역이 만장되어 그리되었다 한다. 여섯개의 묘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애국지사 문양목의 묘 배위 김씨 이찬성’이라는 글씨가 도렷이 새겨져 있었다. 김씨는 문양목 선생의 첫 부인이다. 아이 낳고 1년 지나 죽은. 동학 수배자로 쫓길 때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반자다. 묘비 앞에 서니 무연히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지난 십여년 나는 그와 그녀들의 생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신부에 대한 글을 쓸 작정이었지만 쓰다 보니 갑신정변 을미사변 청일전쟁 러일전쟁 삼일운동 메이지유신 아편전쟁 하와이왕국의 종말 태평양전쟁 … 천지간에 이 많은 사건들이 울퉁불퉁 구불텅구불텅 엮이고 겹치고 연결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자고 한 사람의 생은 전세계와 연동되는 놀랍고도 기적적인 일이고야 마는 걸 목격하게 되었다.
준비해 온 제수와 책을 진설하고 절을 했다. 장편소설 ‘범도’를 쓴 방현석 작가는 홍범도 장군 묘비 앞에 절을 하지 못했다고 작가 후기에 썼다. ‘나는 수위로 최후를 마친 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과 그와 더불어 살았던 이들의 생애를 생각했다. 그리고 일어선 나는 친일파 장군들이 묻힌 묘역을 올려다보았다. 일본 육사와 만주 군관학교를 나온 그들은 그가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일 동안에도 중앙아시아에서 극장 수위로 치욕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에도 그가 끝내 보지 못한 해방된 조국에서도 승승장구했다. 뇌수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외쳤던 자들이 그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내려다보았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나는 그에게 끝내 절을 올리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에게 절을 하면 그의 윗자리에 있는 친일파 장군들이 절을 받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순직한 젊은 소방대원들, 세월호 교사들의 묘비와 나란히 있는 그의 묘 앞에 복잡다단한 마음이지만 기꺼이 절을 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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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앞에 앉아 둘러보니 사방의 산줄기가 묘역을 감싸안고 있었다. 두고 떠났던 산과 들에 다시 돌아와 선생은 좋을까? 살아생전 한번은 오고 싶었을 고향 땅에 뼛가루로 귀환했지만, 그래도 이 산하에 계시니 가끔은 와 이번 책에 내가 못다 전한 이야기가 있을지 물어볼 일이다. 문양목 선생 옆으로 나란히 있는 다섯분의 이름도 소리내어 읽어본다. 김덕윤, 김기주, 한응규, 임창모, 김재은, 브라질에서 캐나다에서 돌아오신 분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도 언젠가 한권의 책으로 엮이어지길. 먼 곳으로부터 오는 이야기에 때로 진실이 담겨 있으니.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