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인간’이 귀해진다···AI 시대, 다시 떠오르는 철학과
고대 철학자와 인공지능(AI) 시대 대학생이 대화하는 장면을 구현한 이미지. 변희슬 기자
찬밥 신세는 이제 옛말일까. 취업에 유리한 실용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인기 학과로 분류돼온 철학과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수시모집 결과 주요 대학에서 철학과가 경쟁률 상위권을 차지했고, 대학 교육 현장에서도 철학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기술 발달로 무한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인간의 고유한 ‘질문하는 능력’의 가치가 더욱 커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인공지능(AI) 연구·개발을 주도하는 주요 빅테크 역시 철학자들을 잇따라 채용하고 있다.
과학기술 인재가 모인 곳에서도 철학 수업이 인기라고 한다. 안강훈 광주과학기술원(G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예술을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미학과 예술의 이해’와 고대 그리스·인도·중국 철학의 기원과 원류를 함께 살펴보는 ‘고대 철학의 이해’ 수업을 진행 중이다. 안 교수에 따르면 이번 학기 그의 수업 2개를 듣는 인원은 334명이다. 전체 재학생 약 1000명 규모인 GIST에서 3분의 1 가량이 수강 중인 것이다.
안 교수는 지난 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철학과 인기를 실감하고 있다”며 “급변하는 사회에서 인류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왔고, 지금의 변화는 어떤 의미인지 등을 이해하는 데 철학이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GIST는 올해 하버드대 출신 철학자 2명을 영입했는데, 안 교수가 그 중 한 명이다.
철학과 인기는 대학입시에서도 나타난다. 2027학년도 대입 수시모집에서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모두 철학과가 인문계열 학과 중 경쟁률 상위권에 올랐다. 지난 10일 종로학원이 수시모집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인문계열 학과 기준 서울대 철학과는 3위(경쟁률 15.44대 1)를 차지했다. 고려대 철학과는 3위(경쟁률 113대 1), 연세대 철학과는 9위(경쟁률 78대 1)를 각각 기록했다.
2027학년도 대학수학능력 9월 모의평가일인 지난 2일 서울 송파구 방산고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AI 시대 ‘질문하는 능력’의 가치가 더욱 커지면서, 탐구와 사색을 훈련하는 철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AI로 방대한 지식을 손쉽게 습득할 수 있게 되면서 ‘얼마나’보다 ‘어떻게, 무엇을’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AI를 활용할 때 좋은 질문을 넣어야 좋은 결괏값이 나오는데, 철학은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라며 “과거엔 관점은 이미 정해져 있고 거기서 나오는 지식만을 습득했다면, 이젠 관점 자체가 더 중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특히 통합형 수능 시행 등 문·이과의 경계가 점차 흐릿해지면서 철학과가 문·이과를 아우를 수 있는 학과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철학과 공학을 복수전공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재가 주목받게 된 것이다. 경영학과에 집중됐던 수요가 다른 학과로 분산된 영향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논리적 분석력을 기르는 철학과의 교육 과정이 법학적성시험(LEET·리트) 고득점에 유리하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을 위해 철학과에 진학하는 사례가 늘어났다기보다는, 반대로 철학을 공부한 학생들이 리트에서 좋은 점수를 내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예전에는 주요 대학 경제·경영학과에서 로스쿨 합격생이 많았다면, 이젠 주요 대학 철학과 학생들도 상당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며 “로스쿨 합격자들의 출신 학과 구성이 달라질 수 있는 변곡점”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빅테크에서도 철학자 고용 사례가 잇따랐다. 구글 딥마인드는 케임브리지대의 철학자 헨리 셰블린을 영입했다. 셰블린은 영국 최초로 AI 윤리 석사 과정을 공동 설립한 연구자로, ‘철학자’(Philosopher) 직책으로 구글 딥마인드에 채용됐다.
2021년 앤트로픽에 합류한 철학자 아만다 아스켈은 AI가 지켜야 할 행동 기준 등을 담은 ‘클로드 헌법’(Claude’s constitution)의 핵심 저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 7월에는 하비 레더먼 텍사스대 철학과 교수가 앤트로픽 합류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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