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학생의 흔적을 지우면 죄책감 사라질까…연극 ‘빈자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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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안예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단짝 남주은은 친구의 마지막 순간을 되짚으며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자문한다. 친구의 죽음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죄책감이 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이내 타인을 향한 비난으로 바뀐다. “그동안 방관하더니…. 이이림, 임윤준, 노현희에게 복수할 거야.” 주은은 예지의 미세한 구조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 교사들을 겨냥해 학교에서 그들의 자리를 없앨 치밀한 보복 계획을 실행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면 죄책감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시연한 극작가 이경헌의 신작 ‘빈자리 없음’은 학생의 자살 이후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남겨진 이들의 상실과 죄책감, 자기방어와 책임 전가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애도를 아름다운 화해나 손쉬운 위로로 포장하는 대신,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상처 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묻는다.

보복을 실행하는 주은뿐 아니라 세 교사에게도 자기방어의 논리가 작동한다. 담임 교사 이이림은 자신이 담임이 아니었다면 학생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하면서도 “문제가 너무 어려운데 푸는 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수학 교사인 그는 주은의 보충수업을 도우며 그를 이해하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예지가 죽기 전 주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내려 한다. 정답이 있는 수학과 달리 인간의 감정과 죽음에 대한 문제 명료하게 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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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의 자살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 담임의 역량을 문제 삼았던 미술 교사 임윤준은 학생의 죽음과 관련됐다는 억측을 묵묵히 견딘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예지를 격려하고 감쌌다. 하지만 그게 친구들 사이에 괴롭힘을 유발했고, 주은 눈에는 가난하지만 당당했던 예지를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의존적 인간으로 바꿔놓은 행위로 보일 뿐이다. 학년부장 노현희는 25년 교직 생활 동안 수많은 자살 사건을 겪은 인물이다. 그는 “빈자리를 없애야 애들이 안정을 찾는다”며 죽은 학생의 자리를 가장 먼저 치운다. “누군가를 챙기면 누군가는 소외된다”며 교사들에게 학생과 거리를 두라고도 한다. 비극을 수습하고 학교 전체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조직의 논리와 반복된 사건에 익숙해진 노련함이 한 학생의 죽음이 지닌 고유한 의미를 지워버린다.
‘빈자리 없음’은 이경헌의 ‘자살 사별자 3부작’ 마지막 작품이다. 앞선 ‘서재 결혼시키기’(2023년)와 ‘감정 연습’(2025년)이 자살로 아내를 잃은 남성을 중심으로 남겨진 이들의 연대에 주목했다면, 이번 작품은 연대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불편한 감정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죄책감과 후회, 질투와 원망, 책임을 피하려는 마음은 서로 위로해야 할 사람들 사이에 증오와 균열을 만든다. 그 불편한 감정의 파고를 넘어야 비로소 새로운 위로와 연대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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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피해자와 가해자, 책임져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명쾌하게 나누지 않는다. 대신 따돌림을 피하려고 더 약한 친구의 고통을 이용하는 학생과 이를 방치하거나 무감각하게 대하는 교사들을 통해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방관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특히 노현희가 “자살 사흘 전 상담 요청이 구조 요청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피곤한 문제에 끼어들기 싫었다”고 털어놓거나 “가정환경이 멀쩡한 애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대목은 오랜 경험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채고 해결하는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작품은 교실과 상담실, 미술실, 옥상 등 여러 공간을 오가며 25개 장면을 퍼즐처럼 배치했다. 예지의 죽음을 둘러싼 기억과 관계가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지 않는 상황을 반영한 구성이다. 관객은 180분 동안 주은의 복수 계획을 따라가며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지만, 모든 조각이 모여도 죽음의 이유와 책임은 명료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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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사별자 3부작을 모두 연출한 신명민은 연출 노트에서 “애도에는 정답이 없다”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누군가의 슬픔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이 존재할 자리를 내어주는 일인지 모른다”고 썼다. 공연은 10월 28일부터 11월 1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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