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답정너’ 공론화도 민주주의인가
이재명 정부의 보건복지부는 여론에 민감하다. 복지부는 지난 6월 탈모 치료제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논의를 연기했고, 7월 근로소득 외 소득이 일정 기준 이상인 직장인의 건강보험료를 사실상 인상하려다 논의를 중단했다. 이달 초 내년도 예산안을 공개하면서는 수급 대상을 축소하는 내용의 기초연금 제도 개편을 보류했다. 정책 방향에 반발하는 기류가 감지되자 추진을 멈춘 것인데, 여론을 예민하게 살피는 것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특히 복지부는 연금·건강보험 등 국민의 일상을 넘어 생사와 결부된 정책을 다루는 부처다. 듣지 않고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여론 감수성이 과도한 편이 낫다.
여론을 국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는 것은 이재명 정부의 ‘추구미’이기도 하다. 국무조정실에 공론화운영위원회를 설치했고, 위원회가 정한 의제를 시민 숙의단이 논의하는 공론화 작업을 하반기 본격화한다.
숙의민주주의 기치 내건 현 정부
시민토론에 부쳤던 촉법소년 문제
이 대통령 “여론 다시 수렴” 지시
원하는 답 나올 때까지 계속될까
정부가 시민들의 숙의를 거쳐 정책 대안을 내놓은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성평등가족부는 형사미성년자(촉법소년) 연령 기준 하향 여부를 논의하고자 지난 3~4월 사회적 대화협의체를 운영하고, 그 일환으로 시민 212명이 참여하는 1박2일 숙의토론회를 개최했다. 대화협의체는 이를 토대로 지난 7월 촉법소년 연령 기준을 강력·중대·반복 범죄에 한해 현행 ‘만 14세 미만’에서 1세 하향하자는 권고문을 발표했다.
권고문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숙의를 거치며 시민 참여단의 태도가 변화하는 모습이었다. 숙의토론회 전후로 참여단의 의견을 조사해보니 촉법소년 연령을 유지하자는 의견은 11.3%포인트 증가한 반면 연령을 일괄 하향하자는 의견은 7.1%포인트 감소했다. 대화협의체에 따르면 참여단 전반적으로 촉법소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감소하고 긍정적 인식이 증가했으며, 처벌보다 범죄 예방 지원책이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이 상승했다.
시민 참여단은 사안을 학습하고 이해하게 되자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고 의견을 수정했으며, 서로 합의점을 발견해 권고문을 도출해냈다. 정부가 지향하는 숙의민주주의의 이상적인 풍경이 이런 것 아니었을까. 대화를 통해 이견을 조율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수고는 시도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숙의토론회는 극단적인 비난과 혐오를 주고받는 온라인 댓글 창이 여론의 전부가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도 새삼스레 확인시켜줬다.
그리하여 이제 대한민국에 숙의민주주의가 만개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성평등부의 권고문 발표 이후 정부의 촉법소년 논의가 전개된 과정은 오히려 그 반대다. 권고문 발표 당일 이 대통령은 연령 기준을 2세 하향하는 방안을 포함해 국민 의견을 추가 수렴하라고 성평등부에 지시했다. 얼마 후 정부가 여론조사를 벌여 의견을 추가 수렴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 대통령은 지난 8월25일에도 “(연령 하향) 범위는 정해져 있다. 1~2세 범위 내에서 중대·반복 범죄에 대해 낮추는 것”이라며 “국민의 의견이 어떤지 다시 점검하고 조기에 정리해 입법하라”고 채근했다.
이 대통령이 2세 하향 방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상황은 그가 원했던 ‘정답’이 따로 있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시민 참여단 200여명이 1박2일의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들은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지금 이 대통령에게는 시민 참여단이 아닌, 다른 국민의 다른 여론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촉법소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이재명 정부가 추구하는 숙의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되묻게 만든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숙의와 공론화는 이를 절차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숙의 결과를 정부가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여론의 반대가 극심해도 정부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면 강단 있게 추진하는 것 또한 책임 있는 정부의 모습일 것이다. 다만 숙의 결과와 대통령의 소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정부가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는 분명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여론조사를 벌이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포장하는 건 아무래도 모양 빠지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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