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아의 조각보 세상]이토록 가해자에게 친절한 국가
하나. 경기 안산의 19세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40대 사장에게 준강간 피해를 입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직원 회식 후 만취 상태가 된 피해자가 정신이 들었을 때 강간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지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사장은 동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고, 그가 제출한 일부 삭제된 폐쇄회로(CC)TV에서 피해자의 모습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라고 볼 수 없다며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경찰은 피해 당일 만취한 피해자를 상대로 단 1회 조사를 했고 추가 조사나 참고인 조사는 없었다. 피해자는 휴대폰에 이의신청서를 남기며 죽음으로 재조사를 요구했다.
둘. 전 국민이 분노한 장윤기 사건. 발단은 그가 직장에서 베트남 여성을 스토킹하고 납치해 성폭행하고 감금까지 했지만 묻혀버린 데 있었다. 이후 여고생 이채원양이 살해됐다. 경찰은 첫 번째 사건과 두 번째 사건을 분리해서 발표해 사안의 중대성을 희석하려 했다. 국가수사본부장까지 “조용히 처리하자”며 분리수사를 지시했다. 첫 번째 사건이 제대로 수사되고 처벌됐다면, 이양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
입법·사법·행정 피해자 놓쳐
대한민국 공권력 분명한 실패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아야
셋. 이달 초 30대 공무원이 아내를 살해했다. 가정폭력으로 이혼소송을 내고 피신해 있던 부인을 찾아내 다섯 살 아이 앞에서 칼을 휘둘렀다. 법원에 제출한 이혼 소장에서 부인의 임시 거처 주소를 알아냈던 탓이다.
공권력의 실패. 이 말 이외에 어떤 다른 말로 사태를 설명할 수 있을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공권력의 첫 번째 사명이라 한다면,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분명 실패하고 있다. 경찰과 법원이 그렇고 입법과 사법, 행정의 전 시스템이 그렇다.
안산 강간 사건에서 경찰은 피해자의 말, 몸에 입은 상해, 지인들과의 대화 등 많은 증거를 무시하고 가해자가 제출한 CCTV만을 채택했다. 영상에 나오는 피해자의 모습이 피해자다움, 강제로 끌려가거나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윤기 사건에서 경찰은 사망에까지 이른 피해자의 억울함보다 경찰 조직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조차 피해자가 스스로 보호를 요구하지 않으면 살인이라는 가장 끔찍한 범죄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국가가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무고’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고,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숨어 살아야 하는 사회. 국민의 생명보다 조직의 위신을 더 중요시하는 공권력. 제도도 문제고 사람의 역량도 부족한 사회에서 책임은 누가 지는가.
제도의 문제를 따져보면, 젠더 기반 폭력 중 법적 공백이 뚜렷한 것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교제폭력이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규제하는 가정폭력처벌법은 그 대상을 법률혼과 사실혼에 한정하고 있어 교제관계의 경우 적용이 안 된다. 개선을 위한 법안이 제출돼 있지만, 국회 법사위 등에서 교제관계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미뤄져왔다.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교제폭력을 엄중하게 법제화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허민숙 국회입법조사관,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사람의 역량은 더 심각한 문제다. 경찰의 성인지적 수사 역량은 얼마나 개선되고 있나? 보완수사권의 전면 폐지로 경찰이 독립적인 수사 종결권을 갖게 됐다. 젠더폭력 사건은 성인지적 역량에 따라 해석과 결론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경찰은 여전히 개인의 상식에 의존해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법원이라고 다르지 않다. 최근 부산 돌려차기 사건 재판부가 “피해자의 언론플레이”를 탓했다는 보도는 황당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동등하지 않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젠더폭력 사건들이 발생하고 처리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법부 구성원들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입법부터 사법, 행정에 이르기까지 젠더폭력의 예방과 처리에서 한국 사회는 철저히 가해자 편에 기울어져 있다. 법이든 관행이든 가해 행위의 예방과 가해자 처벌에는 대단히 소극적이다. 이 와중에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판사 재직 시 미성년자 강간, 친족 성추행 사건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변호사 이직 후 성폭력 가해자 사건을 다수 수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행정을 책임질 장관 후보자까지 이토록 가해자에게 친절한 이력을 가졌다니! 이재명 정부의 개혁은 바로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