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감각과 무감각
대한민국은 입국과 난민 심사 회부를 거부했다. ‘이 나라에 너의 자리는 없다’는 완고한 말 앞에서 “돌아갈 나라가 없다”는 항변은 사실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환승 구역에 갇혔다. 전쟁터를 벗어났다고 믿었는데 다시 전쟁 속으로 던져졌다. 평가 순위가 선두를 다투는 세계적 공항에서 콩고의 밀림에서만큼이나 가혹한 전쟁을 치렀다. 밀림에서처럼 노숙했고, 밀림에서처럼 씻지 못했고, 밀림에서처럼 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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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쟁!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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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부터 도망쳤더니 온통 전쟁이었다. 과거 총알과 폭탄으로 허리가 잘린 땅에서 총알과 폭탄 없는 전쟁들이 끝없이 발발했다. 한국은 전쟁이 넘치는 나라였다.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입시 전쟁”에 던져진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취업 전쟁” 한가운데로 징집됐다. 평범한 부모들이 날마다 “출퇴근 전쟁”을 치를 때, 있는 집 부모 자식 간엔 “상속 전쟁”이 살벌했다. 없는 집 청년들이 “전월세 전쟁”에서 영혼이 찢기는 동안, 부동산에 미래를 담보 잡힌 사람들은 “청약 전쟁”에 인생을 걸었다. 초기업과 그 기업 직원들이 “성과급 전쟁”의 담판을 짓고 있을 때, 그 전쟁엔 끼지도 못하는 노동자들은 “생존 전쟁”에서 뼈가 말랐다. 정의의 이름으로 진영의 이해를 덮으며 정치인들이 “폭로 전쟁”을 벌였다. 요리사들도 “계급 전쟁”으로 흑백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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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넘칠수록 전쟁의 참혹과 처절도 흐려졌다. 말을 부풀려 치르는 전쟁들이 일상의 감각을 속였다.
그러니 전쟁을 남발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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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고마(가명·52)의 마음이 폐허를 응시했다. 그의 전쟁엔 비유와 은유가 없었다. 그에게 살 타는 냄새 나지 않는 전쟁들은 모두 허상이었다. 어딜 가나 그를 노리는 전쟁이 있었다. 목숨은 언제나 사활을 오갔다.
집이 불타고 있었다.
응고마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살해당한 형의 주검도 수습하지 못한 채 숲으로 달렸다. 불은 집만 삼킨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와서 쌓은 시간과 모든 관계가 그날(2019년 3월) 재가 됐다.
누구도 나라를 선택해서 태어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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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통치(벨기에), 분리주의 운동(카탕가국과 남카사이), 열강의 이념 대립(미국과 소련), 군사 쿠데타와 독재(모부투), 르완다 종족 분쟁과 침공(1차 콩고 전쟁), 내전과 아프리카 세계대전(8개 국가가 정부군과 반군 편으로 나뉘어 참전한 2차 콩고 전쟁), 300만~540만명의 인명피해(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와 2000만명 이상의 난민 발생, 무장 반군 창궐, 학살, 파괴, 실종, 고문, 강간, 소년병…. 이 모든 비극이 집약된 그의 나라는 콩고민주공화국.
그 나라에서도 하필 그 땅이었다.
동부는 민주콩고 분쟁의 중심지였고, 북키부는 동부 분쟁 지역의 중심이었다. 그의 집은 북키부의 중심인 고마에 있었다. 120개 넘는 무장 단체가 고마를 차지하려고 싸웠다. 그에게 살아간다는 감각은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와 겹쳐 있었다.
누구도 그의 비극과 무관할 순 없었다.
힘없는 나라에게 축복은 저주이기도 했다. 독보적 광물 매장량(지구 코발트의 70%, 콜탄의 70%, 다이아몬드의 30%, 구리의 10% 등)을 두고 수많은 국가, 종족, 민병대, 다국적 기업들이 동부에서 충돌하며 분쟁을 빨아먹었다. 그들에게 전쟁은 놓을 수 없는 이권이었다. 그 피 묻은 광물들이 전세계 전기차(코발트는 배터리 원료)와 스마트폰(콜탄은 저장 장치 재료) 사용자들의 ‘편리’를 지탱했다.
응고마가 굳은살 박힌 손을 내려다봤다.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고 돌을 깨던 감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광물을 찾아 숲을 헤집은 자리마다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절벽을 타고 미끄러지며 응고마는 맨몸으로 콜탄을 캤다. 자동차 부품 딜러였던 그는 2017년 북키부 베니에서 콜탄 채굴에 동원됐다. 이슬람국가(ISIS)와 연계된 무장 민병대 ‘연합민주군’(북키부를 거점으로 활동 중인 ADF)에 끌려갔다. 그가 채취한 콜탄을 팔아 반군은 무기를 샀고, 반군한테 매입한 콜탄은 ‘세탁’ 뒤 국제 시장에 공급됐다.
아직도 총소리가 응고마의 귀를 쏘았다.
삽을 잡았던 그의 손에 총이 들렸다. 군사훈련을 강요받고 연합민주군 조직원으로 전투에 투입됐다. 정부군과의 전투는 무시무시했다. 전선을 이탈해 달렸다. 나무 사이에 몸을 감추고 밤을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어 지냈다.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의 가족들이 그를 찾아왔다.
“죽어라.”
살육이 벌어졌다.
사업 동료들의 요청으로 응고마가 친구를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을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그 친구를 동료들이 납치했다. 그들은 연합민주군 모집책이었다. 연합민주군의 전투에 동원된 친구가 정부군의 총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이 응고마 때문이라고 여긴 친구의 가족들이 복수하러 왔다. 응고마의 형을 살해했다. 응고마로 오인된 쌍둥이 형이 동생 대신 죽었다. 집이 시뻘겋게 타올랐고 식구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그날 헤어진 다섯 아이의 생사를 응고마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코끼리, 고릴라, 침팬지, 기린과 들소….
응고마는 비룽가국립공원(면적 7800㎢의 아프리카 첫 국립공원)에 숨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인간이 야생동물의 터전에 삶을 의탁했다. 공원은 반군의 터전이기도 했다. 증오와 살기엔 피아가 없었다. 연합민주군은 탈영한 조직원을 처단하려 그를 추적했고, 정부와 경찰은 도망 반군이라며 그를 수배했다. 그는 르완다 국경을 넘었다. 인도네시아로 탈출 뒤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필리핀을 거쳐 2020년 2월 팔라우행 비행기를 탔다. 6시간 만에 경유지인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
콩고에서 울다 죽었어야 했는지 모른다고 응고마는 수없이 생각했다.
환승을 기다리다 지쳐 잠든 그가 눈을 떴을 때 여권이 사라지고 없었다. 입국장으로 들어가 난민 인정을 신청했다. 대한민국은 입국과 난민 심사 회부를 거부했다. ‘이 나라에 너의 자리는 없다’는 완고한 말 앞에서 “돌아갈 나라가 없다”는 항변은 사실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환승 구역에 갇혔다. 전쟁터를 벗어났다고 믿었는데 다시 전쟁 속으로 던져졌다. 평가 순위가 선두를 다투는 세계적 공항에서 콩고의 밀림에서만큼이나 가혹한 전쟁을 치렀다. 밀림에서처럼 노숙했고, 밀림에서처럼 씻지 못했고, 밀림에서처럼 굶었다.
공항 의자를 옮겨 다니며 쪽잠을 잤다. 자정 무렵 한산해진 화장실에서 몸을 닦았다. 먹는 일 앞에서 지켜야 할 자존심이란 없었다. 모든 세포를 동원해 끌어모은 친화력으로 승객들이 쳐놓은 경계에 틈을 냈다. 여행의 행선지를 묻고 자신의 위험한 여정을 꺼냈다. 누군가는 탄식했고,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손을 잡아줬다. 한끼 밥의 호의를 얻어내느라 그는 탈진했다.
“아직도 여기 있어요?”
다시 마주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응고마에게 밥을 선물하고 출국했던 사람들이 귀국길에서까지 그를 보자 말했다. 인천공항에서 환승했던 사람들이 돌아가는 길에 재환승하며 물었다. 전세계를 오가는 여행객들이 공항에서 1년 넘게 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응고마의 상황을 밖으로 알렸다. 총칼이 아니라 환대와 연대와 꽃을 든 싸움이었다. 국내 공익 변호사들이 그를 도왔다. 소셜미디어에서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출국길에 환승 구역을 찾아가 생활비와 물품을 전달했다. 응고마가 공항을 나와(2021년 4월) 한국 땅을 밟았을 땐 420일(환승 구역 최장 구금)이 지나 있었다.
어떤 전쟁이 인간에게 가장 파괴적일까.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그의 소송들(현재는 공항 구금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재심 중)을 지원해온 변호사가 축하를 건넸다. 입국 6년 만에 응고마에게 ‘인도적 체류허가’(지난 7월13일)가 났다. 변호사가 쪼그려 앉자 좁은 방이 가득 찼다.
극심한 생활고가 응고마의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월세조차 버거워 지하로 낙하한 방을 작고 검은 생명들이 가로지르며 질주했다. 천장이 내려앉고 곰팡이가 만개한 원룸에서 그는 여전히 여행 중이었다. 환승 구역에서 끌고 다녔던 가방이 공항을 나온 지 5년 넘도록 짐 풀 공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 공항 생활 탓에 얻은 영양실조와 신경계 악화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살아남기 위한 그의 전쟁은 아직 종전에 닿지 못했다.
먼 한국 땅까지 공포가 날아왔다.
지난해 1월 르완다의 지원을 받는 무장 반군 ‘엠23’(M23)이 응고마의 고향을 점령했다. 민간인 학살과 고문, 병원 습격과 환자 납치를 알리는 국제 인권단체들의 보고가 끊이지 않았다. 응고마가 소속됐던 연합민주군과 엠23은 적대 관계였다. 그의 이야기 앞에선 영화와 드라마도 밋밋해졌다. 응고마의 소개로 연합민주군에 납치돼 사망한 친구의 삼촌이 엠23 수장이었다. 송환은 죽음을 뜻했다.
전쟁! 전쟁! 전쟁!
온갖 전쟁이 지구를 부수고 있었다. 전쟁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남발하는 사이 게임이 된 세상은 전쟁의 감각을 잃어갔다. 무감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감각이라기보다 너무 흔하고 익숙해서 망각된 감각이었다. 온몸에 각인된 무참함을 감각하며 응고마가 두 손을 모았다.
그러니 전쟁의 잔인함을 잊지 말라.
이상현(공익법단체 두루) 변호사가 응고마의 왼쪽 가슴에 작은 배지를 달아줬다. 동그라미 안에서 파란 장미(☞24회 ‘꽃으로 싸우는 사람들’) 한송이가 봉오리를 활짝 열었다.

이문영 | 이슈팀 기자. 책 ‘웅크린 말들’ ‘노랑의 미로’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루카스’ 등을 썼다. 세기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진 못해도 누구든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小說)의 주인공은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자격’을 인정받은 적 없는 이야기들이 글이 되고, 읽히고, 연결될수록 언어와, 기록과, 서사의 틈들도 조금은 메워질 것이라 믿는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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