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전쟁 영웅 처칠은 지고, 군사정권 후계자 노태우는 이겼다···선거의 역설
2021년 1월6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워싱턴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 집결해 성조기를 흔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의사당에 난입해 의원들을 위협하고 기물을 파손했다.로이터연합뉴스
결정적 선거들
조귀동 지음 | 북트리거 | 320쪽 | 1만9000원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사람의 의지, 노력, 계획만으로 꽃을 피울 수는 없다. 온갖 예기치 않은 변수와 우연이 끼어든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뉴질랜드는 여성의 정치 참여가 활발한 나라다. 2020년 총선 결과, 전체 의원의 절반가량(48.3%)이 여성이었다. 뉴질랜드의 기득권 남성들이 여성의 정치적 권리 확대에 처음부터 호의적이었을 리는 없다. 1869년 메리 앤 뮐러가 익명으로 여성 참정권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논의가 시작됐다. 1885년 여성기독교절제회(WCTU)의 케이트 셰퍼드는 대규모 청원 운동을 시작했다. 1893년 뉴질랜드 성인 백인 여성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3만2000명이 서명한 선거법 개정 청원서가 의회에 제출됐다. 길이 274m, 무게 7㎏에 달하는 청원서는 세계 최초의 여성 투표권으로 이어졌다.
법안 통과에는 당대 남성 중심 정당의 역학도 작용했다. 다수당이던 자유당은 상대적인 진보 입장이었으나,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면 정치적 우위가 흔들릴 수 있다고 봤다. 청원서는 여성의 표로 열세를 뒤집으려 한 보수 성향 의원을 통해 의회에 제출됐다. 여성 참정권에 미적지근하던 자유당의 입장은 보수 성향 농촌 여성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바뀌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참정권은 여성들의 끈질긴 노력에 ‘정치적 우연’이 겹쳐지며 탄생한 것이다.
뉴질랜드의 여성기독교절제회(WCTU)가 의회에 제출한 274미터 길이의 선거법 개정 청원서. 북트리거 제공
<결정적 선거들>은 지난 100여년간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8번의 선거를 살핀다. 유권자의 선택 이유, 정당과 정치인의 응답과 외면을 알아본다. 이 과정에서 선거와 공동체, 민주주의의 관계가 단선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선거는 민주주의를 살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 국회의원 보좌관, 기자로 일했던 저자의 견해다. 선거는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드라마가 아니라 “사회적인 균열이 특정한 시공간에 드러나는 이벤트”라고도 설명한다.
유권자에게 중요한 것은 종종 이념보다 이해였다. 1945년 7월21일 전승기념식에서 큰 환호를 받았던 전쟁영웅인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은 5일 뒤 개표가 이뤄진 총선에서 의석수가 반 토막 날 정도로 대패했다. 영국 유권자들은 카리스마가 없다는 이유로 ‘투명인간’이라고 불렸던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에게 승리를 안겼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계급 간 장벽이 희미해진 영국에선 복지 국가의 열망이 싹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강조한 노동당 공약집은 150만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처칠은 선거 캠페인에서도 여전히 ‘대영제국의 영광’을 외쳤다. 유권자는 ‘먹고사는’ 문제에 무감한 전쟁 영웅을 외면했다.
1988년 2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노태우는 “민주주의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정당한 가치”라고 말하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어색한 풍경이었다. 그는 전임자 전두환과 함께 군사 반란을 일으킨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 거리에 나섰던 시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 후계자인 노태우가 당선된 아이러니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선 결과는 야권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이 주요 요인이었으나, 저자는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를 내건 노태우의 중산층 공략도 주효했음을 지적한다. “중산층은 민주화를 원했지만, 민주화가 경제를 뒤흔드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에서 치러진 두 번의 선거를 통해서는 민주주의의 ‘규칙’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미국의 선거제도는 복잡하고 불합리하기로 유명하다. 오래된 선거제도를 바꿀 추진력은 작은데, 저항은 거세기 때문이다. 이상한 선거제도는 2000년 공화당 조지 W 부시와 민주당 앨 고어가 맞붙은 대선에서 사달이 났다. 두 후보의 표 차이가 0.5% 미만이던 플로리다주에서는 주 법에 따라 재검표가 이어졌는데, 얼마나 많은 곳에서 재검표할지, 어느 정도의 기간 안에 마칠지, 무효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를 두고 사사건건 분쟁이 이어졌다.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연방대법원, 주대법원의 각기 다른 권한이 충돌했다. 36일간 이어진 유례없는 혼란은 상·하원 합동 회의의 선거 결과 공식 인준으로 마무리됐다. 민주당 내 일부 의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의장이던 고어 부통령은 담담하게 회의를 주재하며 결과에 승복했다.
‘규칙 안에서 싸우되,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미국인들의 태도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2021년 의사당에 난입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를 통해 형해화됐다. 트럼프는 2021년 6월 “우리는 두 번 이겼다. 세 번째도 이길 수 있다”며 다시 선거를 준비했고, 결국 2024년 승리하며 대통령이 됐다. 트럼프는 선거 캠페인에서 전통적 정당 조직을 넘어, 일론 머스크 같은 부자가 이끄는 외부 조직까지 끌어들였다. 단 10명의 부자가 트럼프가 모은 정치자금의 44%를 댔다. 저자는 2024년 미국 대선을 ‘21세기 정치의 변곡점’으로 본다.
선거는 선과 악, 민주주의자와 독재자가 대결하는 최후의 전장이 아니라, ‘현실 정치’가 치열하게 펼쳐지는 현장이다. 유권자들은 자유·민주·평등 같은 가치를 넘어 “‘나’에게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표를 던진다. 기성 정당이 이에 답하지 못한다면 ‘분명하고 강력한 해결책’을 내세우는 독재자나 포퓰리즘 정치인이 기세를 올린다. 1933년 독일의 나치스, 1994년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그랬다. 21세기에는 도널드 트럼프, 프랑스 국민연합, 독일을위한대안(AfD) 같은 극우정당이 선거에서 선전했다. 저자는 결말부에서 “민주주의는 갈지자(之)로 전진한다”고 적었다. 이런 문장은 강렬한 의지의 산물일까, 냉정한 관찰의 결과일까. 복잡할 수 있는 선거와 정치 국면을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을 읽은 후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겠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