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풀어헤친 여자가 튀어나온 그 밤길처럼 [금자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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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이는 길 위에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논과 밭뿐인 벌판이었지만 모든 게 생소했다.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앞장서 가는 소년은 그런 아이가 못마땅하기만 했다. “빨리 오라”고 몇번이나 역정을 냈는데도 아이는 딴청을 피웠다. 아이가 가져온 이불 보따리를 대신 어깨에 멘 소년은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빨리 오기나 할 것이지’. 뒤에서 따라오거나 말거나, 소년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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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의 어느 늦은 오후, 함안역에서 함안면으로 들어가는 그 길 위에 형제가 있었다. 형제의 이름은 호걸과 호림이다. 호걸은 고등학교 3학년 나이인 18살, 호림은 4살이었다. 호걸은 7남매 중 맏이였다. 호림은 끝에서 두 번째였다.
호걸이 멀찍이 사라진 길 위에 호림이 우두커니 남았다. 오른쪽 야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산그림자 속에 들어간 호림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주위의 빛은 희미해져 갔다. 그때 갑자기 길가 쪽에서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튀어나오더니 ‘히히히’ 웃음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호림은 공포에 질려 냅다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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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자 여사의 동생인 강호림 선생과 4월 첫 인터뷰를 한 뒤, 8월에 전화통화를 했다. 81살의 나이에 폐가 딱딱하게 굳어 기침이 멎지 않는 폐섬유증에 심장질환까지 앓고 있는데, 그 사이 또 다른 암 수술을 했다는 거였다. 2주 전 세세한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문자를 보냈을 때 “나중에 답하겠다”고 했는데, 그때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고 했다. 전화 속에서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힘겹게 통화를 이어가면서도 함안역에서 할아버지 집에 가던 그 길 위에서의 일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당시 함안역에 도착한 4살 호림은 객차에 탔지만 일종의 ‘인간 화물’이었다. 서울역에서 작은형과 함께 화물열차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부산 동대신동 고모 집에 닿은 게 두 달 전이었다. 작은형은 미군 부대에서 일하기 위해 집을 나가고, 8남매가 우글거리는 고모네 집에서 혼자 천덕꾸러기로 남았다. 호림이 대책 없는 가출을 거듭하자, 고모가 호림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함안으로 보낸 거였다. 부산역에서 이불 보따리와 함께 태워진 호림의 등에는 함안 주소가 적힌 종이가 붙었다. 함안역에는 큰형이 마중을 나왔다. 그날 큰형은 불친절하고 까칠했다. 동생을 두고 혼자 가버리기까지 했다. 호림은 그 뒤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에게 잡아먹히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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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본 뒤 무작정 달렸어요. 뛰다 보니 왼쪽에 버스 정류장이 보였고 그 옆에 조그만 가게가 있었어요. 거기 툇마루에 철퍼덕하고 쓰러져 누웠죠. 소리가 나니까 가게에서 어떤 할머니가 ‘너 누구냐’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강약국 손자’라고 했어요. 할아버지가 함안면에서 유명한 한의사였거든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저를 쫓아온 여자한테 ‘저 미친년 또 나왔구먼’하면서 소리를 지르더니 저를 둘러업고 할아버지 집으로 갔어요. 가는 길에 우리 할머니와 마주쳤지요. 할머니가 그때 70이 조금 넘었을 때였죠.”
1950년대에 경전선 함안역은 지금의 함안면이 아닌 가야읍에 있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 집인 함안면 봉성리 중촌부락 972번지까지 네이버 길찾기로 거리를 계산해보았다. 강호림 선생이 시오리(15리, 6km)였다고 기억했는데, 실제로 6.3km였다. 성인 걸음으로 약 1시간37분 걸린다고 나왔다. 4살 아이의 걸음으로는 2시간이 넘을 수 있었다. 이날 어둠 속 형제의 여정은 의미심장했다. 두 사람이 이후 겪을 불행을 암시한 듯해서다.
큰형이 까칠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산형무소에서 형을 살고 나온 직후였다. 경찰 수사를 받으며 전기고문을 비롯해 각종 가혹행위까지 당했던 터라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호림의 누나이자 호걸의 여동생 금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것은 경찰에게 발각된 한 권의 일기장 탓이었다. 1950년 6월 전쟁 발발 직후 함안군 일대가 잿더미가 돼 피난을 가던 와중에 검문소에서 소지품 검사를 당했다. 짐 속의 일기장에는 아버지 강욱중 의원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아버지가 남로당 간첩 혐의로 감옥에 간 일에 대한 비분강개한 심경이라도 담겨있었을까.
호걸은 집안의 기대주였다. 공부를 잘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에 경복중학교 5학년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법관이 될 꿈을 꾸었다. 전쟁이 터지기 한 달 전인 5월 함안에 내려온 것도 기대주를 챙기려는 할아버지의 살뜰한 배려였다. “몸이 허약하니 보약을 지어 먹고 가라”고 했다. 이로 인해 서울 명동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함안에서 전쟁을 맞을 줄 그때는 알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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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은 격렬한 전투의 현장 한복판이었다. 낙동강 전선으로 빠르게 남하한 인민군은 1950년 7월27일께 함양을 점령한 후 하동을 공격했다. 이때부터 9월 말까지 함안군 일대에서 미군 25사단과 인민군 6사단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함안은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았지만, 낙동강 최후방어선의 요충지로서 불바다가 되었다. 미공군기 슈팅스타(F-80)와 무스탕(F-51)은 함안을 비롯한 진주·하동·창녕 등 경남 일대를 저공 비행하며 맹폭격을 가했다. 민가에도 표적을 활활 불태우는 소이탄을 투하헀고 기총사격을 가했다. 함안에 남아난 집이 없었다.*
할아버지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호림이 함안에 갔을 때, 가족이 살던 초가집은 반파되었고, 약제실 등이 있던 약국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호걸은 1·4후퇴 한참 전인 1950년 7월에 그 불바다에서 빠져나왔으나, 피난길에서 경찰의 문초를 받고 형무소에 가야만 했다. 그나마 비슷한 시기 마산형무소 재소자 및 보도연맹원 3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집단학살에 끼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함안에 대한 어두운 기억이 많으시겠어요.”
“그곳에서 저는 사람취급을 못 받았어요. 아이들까지 돌팔매질을 했어요.”
“어떻게요?”
“함안은 신작로에 자갈이 깔려있었어요. 제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였을 거예요. 저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괴기(고기) 호로새끼 빨갱이 새끼’라고 외치면서 돌을 던졌던 기억이 선명해요. 돌아보면 우르르 도망을 가고, 돌아보지 않으면 다시 돌을 던졌어요. 아버지 강욱중 의원이 북에 간 빨갱이라는 소문이 함안에 파다했던 때였어요.”
“형과는 그 후 관계가 어땠나요?”
“제가 망을 봐주는 관계였죠.(웃음).”
“망을 왜….”
“마산형무소에 다녀온 뒤 형은 늘 다락방에 숨어있었죠. 우리 집 골목이 길어요. 신작로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낯선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뛰어들어와 동향 보고를 해주는 거였어요. 한번은 낯선 사람이 찾아와 형을 찾길래 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어요. ‘밀봉교육을 제대로 받았구먼’.”
“형은 왜 숨어있었나요?”
“억울하게 고문까지 당하고 감옥에 다녀왔는데 또 군대에 가야 했어요. 그래서 숨은 건데, 결국 병역기피자 일제 단속 때 잡혀 마산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또 했어요. 형은 젊은 시절 늘 까칠했어요.”
“그때 금자 누나를 비롯한 4남매는 아산 보육원에 있었는데요.”
“그런 줄은 상상도 못 했죠.”
어두운 밤이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함안에서 처음 함께 한 그 밤길 같은 아득하고 우울한 인생의 행로에서 형제는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빛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둘 다 아버지 대신 벌을 받는 모양새였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는 정말 큰 잘못을 했을까. 죄가 명백한 것일까.’ 호림은 나이가 들면서 그 의문에 바짝 다가섰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경남 미군폭격 사건(1기 진실화해위원회, 2010)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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