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에 숨어있던 아버지가 납치됐다 [금자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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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휴일 제외).
금자는 황급히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대규모 폭격을 맞은 거리는 엉망이었다.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건물 잔해들을 가로질러 남대문시장을 향해 달렸다. 엄마에게 빨리 알려야 했다. 아버지가 위험에 처했다!
“1950년 9월23일경 중구 명동 집에 민간인 복장으로 한 사람이 왔습니다. 큰 소리로 다투는 소리가 나서 우리 4남매(4, 6, 8, 12세)는 마당으로 내려와 봤습니다. 그 당시 엄마는 남대문시장에 양식 구하러(2살짜리 막내를 업고) 가시고 없었는데 아버지는 누나(12세)를 불러 엄마를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누나가 간 뒤로 민간인 복장으로 찾아온 사람이 현관문 응접실 등 유리 창문을 권총으로 모두 쏘아 박살 내고 아버지를 향하여 ‘함께 가지 않으면 우리들(4, 6, 8세)을 다 쏘겠다’며 협박했습니다. 아버지가 끌려가시면서 ‘엄마 오시면 금방 온다고 해라’ 하셨고 마당엔 쓰다만 메모지만 굴러다녔습니다. 시장에서 돌아온 엄마는 그걸 보고 대성통곡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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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에서 금자는 ‘누나’로 등장한다. 동생 강호림씨가 2013년 국무총리 소속 6·25 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하면서 낸 자술서의 일부다. 사건 당시 호림은 4살이었다. 전쟁통에 누나 대신 작은 형과 함께 피난 간 동생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자술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어릴 때 기억, 특히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등은 너무너무 또렷하지만, 부분부분 희미한 기억은 누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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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의 세월이 흐른 사이, 7남매 중 세상에 남은 이는 금자, 즉 여사님과 호림씨 뿐이다. 이제 팔순에 접어든 호림씨는 가족사의 한 조각이라도 어떻게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죽기 전에 아버지가 ‘월북자’가 아니라 ‘납북자’라는 사실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쓴 자술서였다. 6·25 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는 기대를 저버렸다. 2013년 5월 ‘납북확인 판단불능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에 불복해 재신청을 했다. 소용없었다. 2014년 1월에 온 통지서도 “판단 불능”이라는 결론이었다.
4월의 첫 만남에서 여사님이 기자에게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아버지의 석방과 납치에 관한 것이었다. 한 가족을 풍비박산 낸 재앙을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이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고음의 비명 같은 현악기의 불길한 선율이 배경음악으로 깔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직 숨이 넘어가는 비극의 절정은 아니었다. 또 다른 절정의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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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14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서울지방법원에서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은 아버지 강욱중 의원은 뜻밖에도 106일 만에 나왔다. 항소심 판결도 안 났는데 그냥 풀려난 것이다. 그날은 1950년 6월28일이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25일 04시를 전후하여 모든 전선에서 포격을 개시했다. 1949년부터 38선 일대에서 쉼 없이 벌어지던 남북 간의 국지전이 드디어 전면전으로 비화하는 순간이었다.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서대문형무소 문을 부수고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아버지 강욱중을 비롯해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형을 살고 있던 국회의원 13명을 포함한 15명 모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가족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할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더 큰 위험과 공포가 도사렸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정치 성향이 곧 북한 정권과 김일성 지지를 뜻하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집 밖으로 일절 나가지 않고 가족들에게 당부했다.
“누가 찾아와도 없다고 하라.”
낮에는 지하실에 내려가 숨었다. 지하실 창문과 출입문은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가마니와 부대 같은 것으로 가렸다. 1인용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희미한 전등 빛 아래에서 책만 읽었다. 지하실엔 모기가 많고 습했다. 아버지는 밤에만 2층 서재로 올라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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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대문 밖으로 수상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밤에 날씨가 더워 창문을 열면 누군가 후다닥 숨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은 곧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인천 쪽에서 쿵쿵하는 포소리가 들릴 즈음이었다. 동생 호림씨는 그날을 9월23일로 기억했다. 낙동강 전선을 끝내 돌파하지 못한 인민군이 후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군의 서울 수복이 눈앞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 북한 요원이 권총을 쏘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사님이 말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빨리 데려오라 했으니까, 정신없이 뛰어나갔어요. 어머니는 전쟁이 터진 뒤부터 양식을 구하기 위해 남대문시장에서 양잿물을 팔았어요. 양잿물은 옷감을 희게 표백할 때 쓰는 거였는데, 전쟁 중에 표백에 대한 수요가 있을 리 없었지만 그나마 밑천이 필요 없는 장사였어요. 막냇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없었어요. 동생들은 울고 있었고, 집은 난장판이었죠. 아버지가 적다만 메모지 한장만 나뒹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그걸 보고 통곡했지요.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을까요? 아버지께서는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 차림으로 끌려가셨대요. 습한 지하실에 오래 있다 보니 피부 습진이 생겨 긴바지를 입지 못하셨거든요. 동생 호림은 아버지 종아리에 모기 물린 자욱이 기억에 남는다고 해요. 아버지가 끌려가면서 한 말은 ‘엄마한테 금방 온다고 해라’였대요.”
“금방 온다”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북으로 갔다. 이것은 납치인가 아닌가. 납북인가 월북인가. 다음에는 어머니가 납치될 차례였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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