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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19, 2026

어른 김장하 선생도 “감개무량”…사람을 이어온 진주문고 40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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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경상남도 진주시 진양호로(평거동) 진주문고에 사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남학생들이 들어왔다. 주말을 이용해 서점을 찾은 이들은 청소년용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아늑하게 꾸며놓은 문학 코너로 홀린 듯 빨려들어갔다. 중학교 3학년 이민준 학생은 “인테리어가 세련되어서 마음에 들고, 가끔 친구들과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집어 들고 “수행평가에 필요해서 읽어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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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40돌을 맞은 진주문고는 오래전부터 아이들의 놀이터, 피신처가 돼왔다. 위험에 처한 아이들에게 “너무 힘들면 진주문고로 무조건 뛰어가라”고 당부하는 어른이 있었고, 아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진주문고 여태훈(64) 대표는 직원들한테 당부했다. “책을 사든 말든, 아이들이 몇시간을 죽치고 있든, 말도 걸지 말고 가만히 놔두자.” 서점은 문턱이 낮았고, 마음이 아프거나 갈 곳 없는 사람이거나 성별과 나이 불문, 누구나 쉽게 드나들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제 아이의 손을 잡고 왔고,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아 데리고 왔다.

5일 진주문고에서 윤수호 어린이가 ‘지역의 섬돌’ 북토크 행사를 기다리며 책을 보고 있다. 엄마를 졸라 이날 서점을 찾았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5일 진주문고에서 윤수호 어린이가 ‘지역의 섬돌’ 북토크 행사를 기다리며 책을 보고 있다. 엄마를 졸라 이날 서점을 찾았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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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진주문고 문학코너에서 한 청소년이 책을 살피고 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5일 오전, 진주문고 문학코너에서 한 청소년이 책을 살피고 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여 대표는 이날 오전, 집무실 옆에 마련한 다실에서 차부터 내렸다. 그는 “아날로그의 최고 상품이 책과 차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둘을 어떻게 결합시킬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목소리에 겸손과 동시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여 대표는 서점 창립 40돌을 맞아 ‘기념 차’를 손수 만들었다. 그는 차의 고장인 하동에서 태어났고, 한국의 근대 차 문화를 형성했다는 긍지가 높은 진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진주문고는 본점 말고도 엠비시(MBC)점, 혁신점, 초전점이 있다. 2024년엔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하동책방’도 냈다.

“차 덕분에 여기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책방을 하려면 좀 대책이 없어야 합니다. 당시 장애인은 직업 선택의 폭이 좁았죠. 장애와 시대가 저를 책의 길로 인도한 셈이지요.”

대표 사무실 옆에 마련된 다실에서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가 서점 창립 40년 기념으로 제작한 차를 우리고 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대표 사무실 옆에 마련된 다실에서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가 서점 창립 40년 기념으로 제작한 차를 우리고 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남 4녀 중 장남인 여 대표는 11살 때 벽돌을 실어 나르던 달구지 바퀴에 몸이 끼이는 사고를 겪고 장애인이 됐다. 1982년 마산(현재 창원) 경남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강의실보다 학교 앞 서점에 더 자주 드나들었고, 학창 시절을 보낸 진주에 서점을 차렸다. 진주 경상대학교(현 경상국립대) 앞에 사회과학서점인 ‘개척서림’의 문을 연 날이 1986년 9월6일이었다. 아버지는 박정희 집권기 새마을운동 시절 다수확 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농부였다. 전답을 팔아가며 아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5년 전 작고한 아버지가 서점이 안정되고 집 나간 탕자가 효자가 되는 걸 보셔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60대의 아들은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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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점은 올해 내내 40돌맞이 행사를 이어왔다. 지난 3월 첫 행사는 40년 단골, 애서가 손형모씨의 책을 선보인 기획전 ‘진주문고에서 산 책 100선’이었다. 1989년 진주에서 발간된 부정기 간행물 ‘형평’ 창간호도 만날 수 있었다. 근대 최초 인권운동인 진주 형평운동의 뜻을 기억하며 창간된, 이제는 볼 수 없는 잡지다. 그달 25일 남궁산 판화가의 강연에는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유명한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 참석했다. 그는 “진주문고가 40년이라니 감개무량하다. 노인들에게 책 선물이 고역이지만 많은 책이 서가에 모였고, 잘 읽었다. 앞으로도 고역을 참고 읽어보겠다”며 감사와 축하의 뜻을 전했다. 여 대표는 “김 전 이사장의 도움 없이 오늘의 진주문고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장하 선생은 1988년 처음 뵈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자신한테도 굉장히 빈틈을 주지 않는 분이고, 거의 말씀이 없으세요. 말을 해도 아주 짧게 핵심만 얘기하시고 주로 듣는 편이죠.”

‘책마을’ 시절 강성호 하동책방지기와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 둘은 오래된 친구사이다. 진주문고 제공
‘책마을’ 시절 강성호 하동책방지기와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 둘은 오래된 친구사이다. 진주문고 제공
‘책마을’ 시절 진행한 문화기행. 진주문고 제공
‘책마을’ 시절 진행한 문화기행. 진주문고 제공
1989년 ‘책마을’에서 연 행사. 진주문고 제공
1989년 ‘책마을’에서 연 행사. 진주문고 제공

‘개척서림’이 대학생들의 해방구였다면, 바통을 이어받아 1988년 문을 연 ‘책마을’은 진주 시민의 해방구였다. 소식지 ‘섬돌’을 발행하고 역사 문화기행, 인문학 콘서트, 음악회를 잇달아 열며 진주 최초의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 이미 80년대에 서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독자와 연결을 시도한 셈이다. 하지만 늘 적자였다. 김 전 이사장은 1992년 어느 날 여 대표를 불러 5천만원이 든 봉투를 무심하게 건넸다. 덕분에 ‘책마을’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그해 ‘진주문고’를 종합서점으로 만들게 되었다.

7년 뒤 외환위기의 여파로 서점이 휘청였다. 매출이 줄고 급기야 서적 도매상까지 부도가 났다. 여 대표는 몇달 동안 술독에 빠졌다. 이러다간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망치겠다 싶어 문득 정신을 차리고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한 그는 ‘어른’을 찾아갔다. 남 돕기는 좋아해도 손 벌리기 어려워하는 성정이었기에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았다.

“김장하 선생께 서점이 힘든 상황에 처했으니 도움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알겠다’는 소리만 하셨는데 이틀 뒤 전화가 왔습니다. 한약방 문을 나서는 제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고 거기에 또 5천만원이 들어 있었어요.”

책방 단골을 상대로 도서구입권도 팔았다. 그런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1999년 서부 경남에서 가장 큰 175평의 대형 서점이 탄생했다. 2005년 무렵 여 대표는 김 전 이사장을 찾아가 1억원을 모두 갚았다.

“이제사 주신 돈 갚으러 왔습니다, 말씀드렸죠. 차용증 없는 돈의 무게가 얼마나 짓눌렀던지 그 뒤에 며칠을 끙끙 앓았습니다. 이 돈을 갚지 않으면 장학금을 받아야 할 학생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허수경 시인이 진주문고 북카페 열림을 축하하며 보낸 축시.
허수경 시인이 진주문고 북카페 열림을 축하하며 보낸 축시.
진주문고에 전시중인 허수경 시인의 편지.
진주문고에 전시중인 허수경 시인의 편지.

진주가 고향인 고 허수경 시인 또한 진주문고와 관련이 깊다. 진주문고가 북카페를 만들었을 때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허 시인은 이를 기념해 ‘진주라는 곳’이라는 축시를 보내왔다.

“허 시인은 가뭄에 콩 나듯 고향을 찾았어요. 저를 보고 ‘형’이라고 불렀는데, ‘형 오늘 시간 있어요?’ 해가지고 한 두세번 그렇게 봤어요. 더러는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갔지요. 허 시인이 고한우 가수의 ‘암연’이라는 노래를 혼자 불렀던 걸 제가 아주 선연히 기억해요. 두 손으로 마이크를 요래 쥐고 모니터의 가사를 안 보고 친구들을 보면서 조용히 불렀던 생각이 납니다. 굉장히 잘 불렀어요.”

2018년 독일에서 허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진주문고에서는 추모 모임과 전작 읽기, 필사 모임이 진행됐다. 허 시인의 가족이 유품을 진주문고에 맡겨왔고, 책방은 40돌을 기념하여 허 시인의 편지와 노트 전시를 하고 있다.

지난 5일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 진주문고 본점에서 연 기념행사에서 축하객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유근종 작가, 진주문고 제공
지난 5일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 진주문고 본점에서 연 기념행사에서 축하객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유근종 작가, 진주문고 제공
5일 진주문고에서 연 ‘지역의 섬돌’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저자 조경국 작가(오른쪽)가 이야기하고 있다. 유근종 작가, 진주문고 제공
5일 진주문고에서 연 ‘지역의 섬돌’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저자 조경국 작가(오른쪽)가 이야기하고 있다. 유근종 작가, 진주문고 제공

40돌맞이 행사의 절정은 5일 오후 본점에서 연 ‘지역의 섬돌’(유유) 출간 기념회였다. 진주에서 동네 헌책방인 소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조경국 작가가 진주문고 40년을 샅샅이 취재하고 인터뷰하여 여 대표와 함께 쓴 책이다. ‘진주문고 키드’로 이 서점에 드나든 지 30년이 넘었다는 조 작가는 상허 이태준이 쓴 ‘무서록’(범우사, 1993)을 30년 전 진주문고에서 샀다. “이태준은 책이 물질 이상인 것이라고 말했죠. 진주문고도 그렇습니다. 한 서점의 역사는 결국 한 도시의 관계망이에요.”

또 한명의 ‘진주문고 키드’인 사공영 출판편집자는 이 행사에 참여하고 싶어 서울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진주를 방문했다. “진주문고 서가는 늘 위트 있고, 재미있어요. 큰 서점은 많지만 이렇게 쇄신하는 서점은 보기 힘들어요. 지금까지 서점이 관리가 안 된다는 느낌을 단 한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진주문고는 2015년부터 9년간 출판사 펄북스를 설립하고 ‘진주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펄북스에서 15종의 책을 책임 편집한 김은경 편집자는 “2018년 ‘예술가들이 사랑한 날씨’라는 732쪽짜리 책을 낼 때 여 대표가 출간을 결단해줘 놀랐는데, 1980년대부터 이미 서점 커뮤니티의 그림을 그리고 독자와 직접 관계 맺은 실험을 했다고 해서 더욱 놀랐다”고 말했다.

2025년 9월 진주혁신도시 내 한국토지주택공사 대강당에서 진주문고가 연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책 ‘호의에 대하여’ 북토크 행사. 진주문고 제공
2025년 9월 진주혁신도시 내 한국토지주택공사 대강당에서 진주문고가 연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책 ‘호의에 대하여’ 북토크 행사. 진주문고 제공
2024년 11월 진주문고에서 연 김탁환 작가의 ‘참 좋았더라’ 북토크. 진주문고 제공
2024년 11월 진주문고에서 연 김탁환 작가의 ‘참 좋았더라’ 북토크. 진주문고 제공
2024년 6월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 북토크에서 저자 로버트 파우저 교수와 어린이 독자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진주문고 제공
2024년 6월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 북토크에서 저자 로버트 파우저 교수와 어린이 독자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진주문고 제공

이병진 진주문고 여서재 팀장은 “김영하 작가의 초청 강연을 어렵사리 성사시키고 진행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번에 40돌 전시를 기획하며 이곳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앞으로 더 다양한 사람들과 이 장소, 자리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디지털 문화가 일상을 점령하는 시대, ‘오프라인’의 만남과 도전을 거듭하고 있는 여 대표는 “지금 출판·서점 산업의 변화가 좀 두렵다”고 했다.

“저는 인공지능 산업 발전 같은 급격한 변화가 이뤄질수록 검증된 것에 집중하려고 해요. 인간다움을 찾고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아날로그 상품이 책이고, 그 책의 집인 서점은 최고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제까지 잘해왔던 것을 하려고 합니다. 지역 커뮤니티 공간을 유지하고,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연대를 지속하고, 발견의 즐거움을 직접 체험하는 서점으로서 큐레이션에 신경을 쓰고요. 지역 출판, 지역 작가 코너를 마련하고 그런 책의 발견성도 높이고요. 서점을 장삼이사의 상점 하나로 취급해선 안 돼요. 정책적으로 정말 섬세한 접근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2026년 7월 말 기준 33만5천명의 인구를 가진 진주에서 진주문고의 누적 회원 수는 11만명. 진주문고는 2021년 1천만원에서 시작해 매년 100만원씩 증액하여 중고교에 책을 기증해오고 있다. 40년 동안 14번의 개·폐점을 거치며 변화와 변신을 거듭해온 데 이어 15번째 도전도 준비 중이다. 엠비시점을 닫고 진주역에 ‘진주문고 스테이션’을 낼 예정이기 때문이다. 여 대표는 이날 북토크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처절한 상인, 낭만적인 문학 소년, 눈물 많은 청년이기도 했고요, 지금은 노년의 초입이기도 합니다. 책을 파는 곳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한 건 아니에요. 디지털 세상에서 인간 개인은 절망적 고독자로 남을 거 같아요. 이런 세상에서 그저 책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 벗이 될 수도 있는 곳, 사람을 사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곳, 책을 파는 곳임에도 누구도 눈치 주지 않는 공간으로서 서점에는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왼쪽)가 사공영 편집자를 만나 인사하고 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왼쪽)가 사공영 편집자를 만나 인사하고 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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