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히딩크와 마줄스 매직의 평행이론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인기 종목인 남자 농구가 무려 44년 만에 안방 아닌 타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대교체 과정인데도 중국, 이란, 일본을 모두 꺾고 정상에 오른 배경엔 여러 요인이 있지만, 특히 니콜라이스 마줄스 감독의 지도력이 조명을 받고 있다. 과거 한국 지도자들에게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리더십으로 불과 부임 9개월 만에 이처럼 뚜렷한 성과를 낸 건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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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20일 일본 나고야 아이치 인터내셔널 아레나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결승전 대한민국 대 일본의 경기. 승리를 거둔 대한민국 선수들이 마줄스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2026.9.20 hama@yna.co.kr
우리 대표팀이 공수 양면에서 시원하고 속도감 넘치게 경기하는 광경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과거 다소 답답했던 한국 농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장신 군단인 중국과 이란을 이번 대회에서처럼 여러 면에서 시종 압도하는 듯한 모습은 솔직히 낯설 만큼 신기했다. 특정 슈터나 빅맨의 개인기에 의존하기보다 코트를 넓게 쓰며 5명 전원이 공수 모두에서 빠르고 유기적인 패턴 플레이를 펼치는 '유로 농구'의 면목이 우리 대표팀에서 엿보이기 시작했다.
유로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이식 중인 마줄스의 모습에서 한국 축구를 전무후무한 세계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이 겹쳐 보인다. 두 명장은 부임 환경, 지도 스타일, 체질 개선 방식, 극적인 성과 등 여러 서사가 무척 닮았다. '평행 이론' 개념을 적용해도 어색하지 않다. 둘 다 유럽 국가 출신이고 선수 시절엔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었지만, 지도자로서 착실히 경력을 쌓아 성과를 내고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둘 다 해당 종목 사상 첫 외국인 감독이란 공통점이 있다. 일본과 공동이긴 하나 최초로 주최하는 대회(2002 한일 월드컵)를 앞두고 '안방 망신'을 피하고자 첫 16강 진출 또는 최악의 경우 본선 첫 승 숙원이라도 이루고자 네덜란드에서 '모셔 온' 감독이 히딩크였다. 직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7위까지 추락했던 수모를 씻어야 하는 남자 농구 역시 절박한 심정이었다. 낡은 틀을 깰 충격 요법이 필요했던 농구계는 수소문 끝에 동유럽 라트비아의 젊은 지도자를 대표팀 수장에 앉히는 개혁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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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 축구 8강전에서 스페인을 꺾고 4강 진출을 확정한 뒤 선수들에게 박수 보내는 거스 히딩크 전 한국대표팀 감독 /특별취재단 / 2002.6.22 (광주=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2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히딩크와 마줄스 모두 외국인답게 기존 이름값과 인맥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최근 실력 하나로만 선수를 선발했다는 것도 똑같다. 협회나 소속팀의 입김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이 부분이 두 감독의 성과에 결정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2002 월드컵에서 맹활약하고 해외로 대거 진출한 일명 '히딩크의 아이들' 면면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박지성, 이영표, 이을용, 김남일, 송종국 등은 히딩크가 없었다면 평범한 선수로 끝났을지 모른다. '마줄스호'에도 이름값은 필요 없었다. 적잖은 스타급들이 승선에 실패했고, 대신 쉴 새 없는 공수 전환과 패턴 플레이를 40분 내내 소화할 만큼 체력 좋고 빠른 젊은 선수들이 대거 선발됐다. 특히 공격만큼 수비도 좋은 전천후 선수들이 중용됐다.
목표로 한 대회 전까지 평가전 등에서 참패를 거듭하며 많은 비난과 교체 요구를 받았다는 점도 같다. 냄비처럼 끓어오르는 비판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래 준비했던 전술과 선수 기용을 하나하나 실험하던 스타일마저 비슷했다. 알다시피 지금의 국민 영웅인 히딩크의 원래 별명은 '오대영'이었다. 유럽 강호들과 평가전에서 잇달아 0 대 5로 대패하자 "빨리 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조롱하듯 붙인 별칭이었다. 마줄스 감독도 잔혹한 적응기를 거쳤다. 베테랑 스타들이 빠진 젊은 팀이 월드컵 예선 등에서 연패하자 "유럽 변방 B급 감독이 한국 농구를 실험실 쥐로 만들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시행착오가 불가피한 적응기를 팬들은 못 참았지만, 마줄스는 결과로 모든 걸 증명했다.
마줄스가 히딩크와 다른 점들도 없진 않다. 선수 시절엔 둘 다 별 볼 일 없었지만, 지도자 경력에선 차이가 나긴 했다. 히딩크는 한국 대표팀 부임 전부터 세계적 명장으로 특급 대우를 받았었다. 한국에 올 때도 '히딩크 사단'을 데려왔고, 거액의 연봉과 성과급도 약속받았다. 하지만 마줄스는 2년 계약에 약 1억 원의 연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코치진 하나 못 데려온 채 단신 부임하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이번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후에 마줄스 감독의 연봉과 20억 원 이상으로 알려진 홍명보 축구 대표팀 감독의 연봉이 비교 대상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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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20일 일본 나고야 아이치 인터내셔널 아레나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시상식. 한국 마줄스 감독이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2026.9.20 saba@yna.co.kr
대표팀 에이스 이현중은 아시안게임 공동 인터뷰에서 금메달 확정 후 눈물을 보인 이유를 묻자 마줄스 감독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국인인 마줄스 감독님이 고생도 많으셨다. 사단도 없이 혼자 오셔서 타지에서 굴하지 않고 저희랑 잘 맞춰 이렇게 금메달을 따서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감독님 때문에 눈물이 많이 났던 것 같다." 선수가 감독을 거론하며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건 흔치 않아 눈길을 끌었다. 마줄스 감독은 다음 목표가 올림픽에서 한국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라고 했다. 새 리더십 아래에서 환골탈태한 한국 농구가 아시아권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선전하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9월29일 07시3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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