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옅은 색의 밥상, 맑은 애호박국
‘새미네부엌’ 요리연구소 제공
며칠째 식탁 위가 온통 빨갰다. 고추장에 버무린 반찬, 매콤한 볶음 요리, 얼큰하게 끓인 찌개. 냉장고를 열어도 붉은 양념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식사를 마친 뒤에도 입안에는 진한 맛이 오래 남았다. 여태 남아있는 끈적한 더위 때문인가. 매콤한 양념에 밥을 비벼 먹고,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먹는 일이 하루의 작은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아무 색도 입지 않은 국물이 먹고 싶어졌다. 맑고 투명한 국물에 초록빛 애호박이 몇 조각 떠 있고, 하얀 연두부가 몽글몽글 자리한 모습. 보기만 해도 입과 속이 한결 말끔해지는 것 같은 한 그릇.
맑은 애호박국은 요란한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애호박을 썰고, 연두부를 떠 넣고, 바지락 해물 육수로 맛을 낸다. 냄비 안에서 재료들이 천천히 익어가는 동안 애호박에서는 은은한 단맛이 배어 나오고, 해물 육수는 그 맛을 받쳐준다. 마지막에 대파를 조금 올리면 국물 위로 싱그러운 향이 가볍게 번진다.
진한 맛을 꽉 채우지 않아도 매력이 넘치는 ‘맑은 애호박국’. 첫맛부터 강하게 다가오는 대신, 숟가락이 몇 번 오갈수록 맛의 결이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살아난다. 시원한 육수 뒤에 애호박의 달큼함이 따라오고, 부드러운 연두부가 그 사이를 매끈하게 이어준다. 밥을 말아도 좋고, 국물만 떠먹어도 좋다. 입안에 남는 것이 많지 않으니 다음 숟가락을 기다리는 일도 퍽 자연스럽다.
‘새미네부엌’ 요리연구소 제공
날씨에, 하루에, 오가는 마음에 지쳐 욕심껏 뻘건 음식을 채워왔다면, 때때로 비워내는 맛으로 방점을 찍는 일 또한 중하다. 무언가를 더하고 더해서 풍성하게 만드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맛으로 나를 살피는 일. 간을 조금 덜어내고, 양념을 걷어내고, 재료 본연의 표정을 살려두는 것. 맑은 애호박국을 먹고 있으면 음식이 가진 본래의 온도와 향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생으로 썰었을 때는 단단하고 풋풋하지만, 뜨거운 국물 안에서는 금세 부드러워지는 애호박. 초록 껍질과 연한 속살 사이에 국물이 스며들고, 젓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면 힘없이 휘어진다. 한 조각을 떠먹으면 씹을수록 은근한 단맛이 올라온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자주 손이 가는 맛이다.
연두부 역시 그렇다. 숟가락을 깊숙이 넣으면 모양을 단정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살짝 무너진다. 국물과 함께 떠먹으면 입안에서 사르르 풀어진다. 씹어야 할 것보다 삼켜야 할 것에 가까운 부드러움. 바쁜 하루를 보낸 뒤에는 이런 식감이 유난히 더 반갑다.
요리를 하면서도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칼끝으로 애호박을 자르는 소리, 냄비에서 국물이 끓기 시작하는 작은 움직임, 하얀 두부 사이로 올라오는 김. 거창한 준비 없이도 식탁으로 향하는 시간이 차분하게 완성된다. 진한 음식이 주는 행복이 있다면, 맑은 음식이 주는 평온도 있는 것이다.
잘 먹었다는 포만감보다 편안히 먹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은 날. 그런 식탁에는 맑은 애호박국 한 냄비가 잘 어울린다.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이 모여 이상할 만큼 단정한 한 끼가 되리니. 조금 옅은 색의 밥상을 차려 천천히 밥을 먹는 것. 오늘의 식사는 그 정도의 가벼움이면 몹시 충분하다. 맑은 애호박국 상세레시피는 아래 새미네부엌 사이트 참고.
‘새미네부엌’ 요리연구소 제공
✅ 옅은 색의 밥상, ‘맑은 애호박국’ 재료
애호박 1/3개(100g), 연두부 1모(90g), 물 2.5컵(500㎖), 대파 1/5대(20g), 요리에센스 연두순 1/2스푼(5g), 연두링 바지락 해물 2개(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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