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 뿌리자 ‘꿈틀’…여름철 쌀·향신료까지 파고든 ‘2㎜ 벌레’ 정체는?
후추를 넣어둔 조리통 뚜껑을 열었는데 작은 갈색 벌레가 움직인다. 쌀통에서도 비슷한 벌레가 나오고, 오래 보관한 차나 향신료에서도 발견된다. 크기가 워낙 작아 처음에는 먼지나 후추 알갱이로 착각하기 쉽지만, 주방의 건조식품을 노리는 벌레일 가능성이 있다.
정체는 대부분 권연벌레(학명:Lasioderma serricorne)다. 영어로는 ‘시가렛 비틀(Cigarette beetle)’이라고 한다. 이름 때문에 담배에서만 발견되는 벌레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먹이 범위는 훨씬 넓다. 미국 농무부(USDA)는 권연벌레가 담배뿐 아니라 다양한 저장식품에 피해를 주는 해충이라고 설명한다. 성충은 몸길이가 약 2~3㎜ 정도로 작고 적갈색을 띠며, 옆에서 보면 머리가 아래로 숙여진 듯한 볼록한 형태가 특징이다.
후추·향신료를 특히 좋아하는 ‘주방 해충’
권연벌레가 골치 아픈 이유는 먹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 따르면 권연벌레는 가정에서 향신료, 쌀, 생강, 건포도, 후추, 씨앗, 말린 식물류 등을 공격할 수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역시 파프리카를 비롯해 쌀, 커피콩, 말린 과일·채소, 땅콩, 건포도, 건어물 등을 권연벌레가 가해할 수 있는 식품으로 꼽는다. 특히 파프리카와 건조 사료는 가정에서 흔히 공격받는 식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후추통에서 권연벌레가 발견됐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가정용 저장식품 해충 자료에는 권연벌레의 먹이로 ‘후추’가 명시돼 있다.
쌀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 농무부 자료는 권연벌레가 여러 저장식품을 가해하며 곡물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권연벌레는 쌀과 향신료처럼 수분이 적은 식품에서도 번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저장식품 해충이다.
권연벌레. 위키피디아
그런데 벌레는 어디서 들어왔을까. 집 안에서 갑자기 권연벌레가 생겼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장식품 해충은 식품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미국 캘리포니아대(UC) 통합해충관리(IPM) 프로그램은 저장식품 해충이 보통 이미 해충에 감염된 식품 포장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개체 수가 적어 눈에 띄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성충이 식품 밖으로 기어나오거나 날아다니면서 존재가 드러난다.
따라서 후추통에서 한 마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후추통만 확인해서는 안 된다. 같은 찬장에 있는 쌀, 밀가루, 향신료, 차, 건조식품 등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실제로 해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경험담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 이용자는 향신료인 큐민을 담아둔 용기에서 2㎜가량의 작은 벌레가 여러 마리 발견됐다고 전했다.
여름 지나고 더 신경 써야 하는 이유
권연벌레는 따뜻한 환경에서 번식이 활발해진다. 국내 농촌진흥청 관련 연구진이 참여한 연구에서도 한약재를 28℃에서 보관했을 때 권연벌레 개체군이 빠르게 형성됐으며, 배설물과 사체, 구멍 등이 발생해 품질과 위생에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농무부 자료에 따르면 권연벌레의 알에서 성충까지의 발육 기간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만 유리한 조건에서는 약 6~8주가 걸린다. 성충의 수명은 약 2~4주이며 암컷 한 마리가 최대 100개가량의 알을 낳을 수 있다.
즉 여름철 따뜻한 주방이나 찬장 안에서 번식이 진행됐다면, 계절이 바뀐 뒤 성충이 기어나오면서 뒤늦게 발견될 수 있는 셈이다.
국내 자료에서도 권연벌레는 연 2~3회 발생하며 유충 상태로 월동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서울시 자료에 수록된 문화재 생물피해관리 자료 역시 권연벌레가 5~6월, 6~9월, 9월 이후 등 여러 시기에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권연벌레를 발견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앞의 벌레를 잡는 것이 아니라 발생 원인을 찾는 것이다. 미국 미네소타대 자료를 보면, 저장식품 해충이 발견됐을 때 감염된 식품을 버리고 식품을 보관했던 찬장과 선반, 틈새를 진공청소기로 꼼꼼하게 청소해야 한다. 식품은 유리·금속 또는 두꺼운 플라스틱 등 밀폐 용기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또 해충이 발견된 식품은 버리고 찬장 구석과 틈새를 진공청소기로 청소한 뒤 건조식품을 밀폐 용기에 보관해야 한다. 특히 밀가루·향신료·곡물처럼 자주 사용하지 않는 식품은 냉장고나 냉동고에 보관하는 것도 좋다.
반대로 주방 전체에 살충제를 뿌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미네소타대 권고사항을 보면, 모두 식품을 보관하는 찬장에 살충제를 사용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이미 식품 안에 들어간 벌레에는 살충제가 효과적이지 않고, 식품 오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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