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 기자의 클래식 샛길] 같은 선율, 다른 얼굴···‘볼레로’를 눈으로 듣는다
영화 <고잉홈프로젝트: 라벨&쇼스타코비치 인 시네마>에서 작은북 연주자가 현악기 사이 무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영화 공식 예고편 유튜브 갈무리
관악기 플루트와 클라리넷, 오보에, 바순. 소리만 듣고 곧바로 구별할 수 있을까. 클래식을 자주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쉽지 않다. 라벨의 ‘볼레로’는 이런 차이를 알아보기에 꽤 좋은 곡이다. 가능하다면 연주 장면까지 함께 보는 편이 더 재미있다. 최근 개봉한 공연 실황 영화 <고잉홈프로젝트 : 라벨&쇼스타코비치 인 시네마>에서 그 차이를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과 라벨의 ‘볼레로’를 담았다. ‘볼레로’가 시작되면 작은북(스네어 드럼)이 일정한 리듬을 두드리고 그 위로 플루트가 선율을 이끈다. 이어 클라리넷, 바순 순서대로 같은 선율을 넘겨받는다. 화면도 그때마다 연주자를 가까이 잡는다. 악기의 모양과 연주하는 모습, 소리에 연주자의 표정까지 한꺼번에 들어온다.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 전체를 멀찍이 바라볼 때나 배경음악으로 들을 때 그저 흘려보내던 선율이 어떻게 직조되는지, 같은 음표가 악기에 따라 어떻게 다른 얼굴을 갖는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악기마다 음색은 다르다. 같은 높이의 ‘도’(C)를 내더라도 플루트가 맑고 가볍다면 바순은 낮고 짙다. 똑같은 문장을 말하더라도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른 것과 비슷하다. 라벨은 바로 그 차이를 가지고 놀았다.
‘볼레로’의 구조는 단순하다. 작은북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같은 리듬을 되풀이한다. 그 위로 두 개의 비슷한 선율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의 설명에 따르면 모두 18차례에 이른다. 처음에는 플루트, 클라리넷 등 서로 다른 악기가 차례로 솔로를 맡다가 뒤로 갈수록 여러 악기의 음색이 겹쳐진다. 음량도 서서히 커진다. 라벨은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대신 ‘누가 노래하나’를 바꾸면서 15분이 넘는 음악을 끌고 간다. 곡의 중심축을 잡는 작은북은 2마디짜리 리듬 패턴을 169차례 반복한다. 긴 연주 시간 동안 흐트러지지 않는 박자를 유지하면서 음량만 서서히 키워가야 하는 고난도 연주를 선보이는 작은북 주자는 이 곡의 숨은 주역이다. 이번 영화 속 공연에서는 작은북을 평소 타악기 자리인 무대 뒤편이 아니라 현악기들 사이 앞쪽에 배치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프랑스 영화감독 파트리스 르콩트는 아예 작은북 주자의 고역을 코믹하게 담은 단편영화 <볼레로의 타악기 연주자>(Le batteur du Bolero)를 만들었고, 1992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단편영화 <볼레로의 타악기 연주자>의 한 장면. 유튜브 캡처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이 곡은 묘하게 관능적이다. 어쩌면 태생부터 그랬다. ‘볼레로’를 라벨에게 주문한 사람은 러시아 태생의 무용수이자 공연제작자 이다 루빈슈타인이었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에서 활동했던 그는 1928년 자신의 공연을 위해 라벨에게 스페인풍 발레음악을 의뢰했고, 그렇게 탄생한 ‘볼레로’ 초연 무대에서 20명의 남성 무용수와 함께 춤췄다. 베를린 필은 당시의 안무가 음악의 점층적인 고조와 맞물려 상당히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무대로 받아들여졌다고 소개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발레 ‘볼레로’는 프랑스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가 1961년 만든 작품으로, 지금은 베자르 발레 로잔의 대표 레퍼토리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 이 작품의 주역을 맡았던 발레리노 김기민은 당시 인터뷰에서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다 보니 춤의 순서를 익히기 쉽지 않았다”면서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 등 선율을 이어받는 악기 순서를 아예 외웠다”고 했다. 어느 악기가 연주하고 있는지가 자신이 음악의 어디쯤 와 있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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