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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October 22, 2026

오제도의 신화 속에서 남로당 하수인이 된 아버지 [금자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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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에서 오제도 검사(박근형 분)가 남로당 공작원에게 살해당한 김호익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네이버 영화
영화속에서 오제도 검사(박근형 분)가 남로당 공작원에게 살해당한 김호익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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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씬 15. 회의실

오제도 : 아무래도 소장파 의원들의 거동이 이상해. 도대체 이 친구들 세상 물정을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이따위 수작을 남로당이 어떻게 이용하겠나 생각해봐! 필경 60명에 가까운 소장파 속에 공산당과 연관이 있거나 지지하는 자가 있어!

최운하 : 소장파 속에서도 핵심멤버는 겨우 노일환 이문원 박윤원 김병회 황윤호 최태규 강욱중 이구수 배중혁 김옥주 정도 10여명에 불과합니다.

오제도 : 뭣이? 김옥주도 핵심 멤버야? 하여튼 앞으로 국가보안법이 통과되면 남로당의 공작이 더욱 기교해지고 악랄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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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푸락치’라는 이름의 영화를 보았다. 거대한 스크린 따위는 없었다. 대여섯명이 앉으면 가득 차는 좁은 공간에서 24인치 정도 크기의 수상기를 앞에 두고 대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관람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열람’이었다. 이 자리엔 강금자 여사님도 함께 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5분도 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인 강욱중과 동료 의원들의 이름이 호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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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오재호 원작, 권영순 감독, 한진흥업 제작으로 개봉한 이 영화의 존재를 안 뒤 직접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국가 영상 아카이브 기관인 한국영상자료원의 문을 두드렸다. 디지털화된 영상은 없고, 필름 상태로만 보존고에 있다고 했다. 결국 보도 목적을 명분으로 정식 절차를 밟은 끝에 보존고에서 필름을 꺼냈다. 지난 8월 중순의 어느날 오후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본원 2층 필름검색실에서 스틴벡(steenbeck)이라 불리는 아날로그 필름 편집재생장치에 35mm 프린트 필름을 걸었다. 전문 아키비스트의 도움으로 필름을 다섯번이나 갈아 끼우느라 108분 영화를 다 보는데 2시간30분이 걸렸다.

‘푸락치’라는 옛 표기법에서 보듯, 무려 52년 전 영화다. 개봉된 해에 대종상 우수반공 영화상을 수상한 점으로 미뤄보면, 이 영화가 국회프락치 사건을 어떻게 다뤘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사님께는 영화 내용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고 미리 언질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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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18일 오후 강금자 여사(가운데)가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본원 2층 필름검색실에서 35mm 프린트 필름을 건 아날로그필름 편집재생장치를 통해 영화 ‘국회 푸락치’를 보는 모습. 고경태 기자
지난 8월18일 오후 강금자 여사(가운데)가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본원 2층 필름검색실에서 35mm 프린트 필름을 건 아날로그필름 편집재생장치를 통해 영화 ‘국회 푸락치’를 보는 모습. 고경태 기자

영화의 오프닝 씬은 5·10총선거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 장면이었다. 이어 여수·순천 사건으로 불붙은 민가, 전투 장면이 흐른 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남로당 공작원과 수사관들 간의 긴박한 추격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씬이 바뀌며 긴 복도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나이…. 그 밑으로 자막이 깔렸다. ‘검사 오제도.’

1970년부터 동아일보 산하 동아방송의 라디오드라마로 방송된 ‘특별수사본부’를 영화화한 일곱 작품 중 하나인 ‘국회 푸락치’는 오제도에 의한, 오제도를 위한, 오제도의 영화다. 오제도는 노일환·이문원 강욱중 등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체포된 국회의원들을 선우종원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검사다. 그 시대를 겪은 많은 이들의 뇌리엔 ‘반공검사의 대명사’로 각인돼 있다. 이 영화는 그가 썼다는 책 ‘추격자의 증언’에 묘사된 국회프락치 사건의 얼개를 그대로 가져왔다. 국회 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 침투한 프락치들을 자신이 주도한 특별수사본부를 통해 일망타진했다는 내용이다. 애초 라디오드라마 ‘특별수사본부’도 오제도의 수기를 바탕으로 한 거였다.**

지난해 고독한 노인들의 애틋한 무전취식을 다룬 영화 ‘사람과 고기’에서 주연을 맡아 큰 감동을 주었던 원로배우 박근형이 콧수염을 달고 오제도로 열연했다. 1940년생인 그의 나이 34살 때다. 국회프락치 사건에서 핵심 주동자로 지목된 제헌국회 소장파의 리더 노일환과 이문원은 각각 정욱과 문오장이 연기했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경대에 의해 구속돼 친일파 경찰들의 위기의식에 불을 질렀던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 역은 박암이 맡았다. 호화 캐스팅이었다.

씬 24. 어느 요정 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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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복 : 누가 뭐래도 의원님의 정치 이념대로 밀고 나가십시오. 뒤에는 저희들이 있습니다. 노 의원께서야 출신구 사람을 어떻게 다 일일이 기억하시겠습니까만 의원님이라면 전 아주 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노일환 : 허… 그렇게까지 정말 고맙소. 귀한 동지가 생겨서.

김사복 : 이건 제 성의올시다. 많은 소장파 의원들의 진두에 스셔서 불철주야 국사에 골몰하시자면 자연히 쓰일 곳도 많으시니…. 정말 성의올시다.

노일환 : 아니 이건…돈을…이렇게 많이.*

영화 속에서 제헌국회 소장파는 타락에 찌든 정치인이다. 노일환은 남로당 공작원 김사복에게 거금을 받는데, 전마담이라는 여인의 유혹에도 넘어가 동침을 하면서 약점을 잡힌다. 이문원은 적극적으로 돈을 밝히고 으스대는 캐릭터로 나온다. 올가미에 걸려든 두 사람은 결국 남로당 입당원서를 쓴 뒤 당의 지령에 따라 외군철퇴와 미 군사고문단 설치를 반대하는 내용의 진언서를 유엔 공식파견기구인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한다.

반면 오제도는 강직하고 청렴한 영웅으로 나온다. 노일환과는 달리 전마담의 손짓을 단호히 거부하고, 소박한 사무실에서 오로지 공산당으로부터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만을 고심한다. 공산당 비밀선을 밤낮없이 감시하느라 과로하던 김호익 총경이 남로당 요원에게 살해당하자 오제도는 그의 주검 앞에서 “김호익을 살려내라”고 절규하다가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우리의 생명이 아니라 이 나라 민주주의”라고 멋지게 일갈한다. 국회프락치로 전락한 자신의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과 동기 김옥주 의원에게는 어떻게든 관대함과 우정을 지키려고 한다.

씬 54. 사무실(밤)

김사복 : 노 의원(노일환) 밑에 김옥주 황윤호 강욱중 최태규! 이문원 밑에 김병회 이구수 배중혁 의원 배치했습니다.”

이문원 : 이 사람들이 죄다 같은 당원입니까?

김사복 : 그런 건 질문하는 게 아니에요! 또 알 필요도 없는 일이고 설사 안다 해도 말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무슨 주책없는 짓입니까? 그리고 김약수도 포섭하시오.

강욱중이라는 이름이 남로당 공작원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남로당 국회프락치 조직도에서 노일환 밑으로 배치됐다는 것이다. 이문원은 김사복에게 괜한 질문을 했다가 면박을 당하고 “국회부의장 김약수도 포섭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노일환·이문원은 남로당의 완벽한 하수인으로 그려진다. 국부 속에 암호수표를 넣었다가 경찰에 발각돼 국회프락치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제공한 것으로 발표된 여간첩 정재한한테까지 시시콜콜한 지령을 받는다. 정재한이 나중에 경찰에게 몸수색을 당하며 뒷모습을 나체로 노출하는 장면은 당시에는 꽤 자극적이었을 법도 하다.

영화 종반부에선 오제도 검사의 취조 장면을 통해 노일환 의원이 모든 혐의를 시인하고 자백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어이지는 오제도의 준열한 논고. 피의자들에게 실형이 언도 됐다는 내레이터의 목소리와 함께 친구 김옥주 의원을 면회하고 법원 뜰을 쓸쓸히 걸어 나오는 오제도의 마지막 시퀀스로 영화는 끝났다.

“어떻게 보셨어요?”

“아버지께서 능동적으로 사건의 중심부에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명단에만 조금 나와서 다행이다 했지요.”

“직접 본 실존인물도 있을 텐데요.”

“이문원 의원은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얼굴이 넓적하지 않았어요. 얼굴 폭이 약간 좁고 길이는 갸름한 편이었어요.”

“하하하. 내용은 어떠셨나요?”

“노일환 의원 유족들이 보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아플까요. 이상한 장면이 많잖아요.”

“오제도는 멋있게 나왔죠?”

“그 사람은 자기 실적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거죠. 자기주장만 밀고 나간 거죠.”

영화가 끝난 뒤 여사님은 말을 아꼈다. 명단으로만 등장하지만, 영화 속 프락치 강욱중의 딸로서 내놓는 평 치고는 온건하고 투박하고 겸손했다. 그러나 어쩌면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가 사라진 금자네 가족의 파란만장한 비극은 좁게 보면 ‘검사 오제도의 실적 올리기’가 낳은 결과였다.

영화가 개봉된 1974년은 국회프락치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25년이 흐른 시점이다. 대통령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바뀌어 있었다. 유신정권의 공포정치가 각종 긴급조치 등을 통해 정점에 이르던 때였다. 6개월 뒤인 1975년 4월엔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고 8명이 사형 확정판결 하루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엄혹한 시대, 영화 ‘국회 프락치'는 민간 영화사가 국가적 이념이었던 반공주의에 적극 부응하며 제작한 일종의 프로파간다물(선전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50여년이 흐른 지금, 그 프로파간다는 죽지 않았다. 제헌국회의원 13명이 1심에서 받은 유죄의 낙인, ‘월북’의 꼬리표도 벗겨지지 않았다. 다만 오제도의 주장과 실적을 곧이곧대로 믿는 시대는 지났다. 오제도는 누구인가. 오제도가 다 했나? 오제도의 상부는 누구였나. 영화 ‘국회 푸락치’가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하나둘 생겨났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국회 푸락치’ 심의대본

**유신 이후의 반공영화와 오제도라는 ‘신화’-영화 ‘특별수사본부’ 시리즈를 중심으로(전지니, 2015)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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