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한복판에 걸린 기묘한 꿈…델보부터 쿠사마까지
폴 델보 ‘크리스마스의 밤’(1956).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 제공
화면 한쪽에 보름달이 떠 있는데 붉은 옷을 입은 금발의 여인이 선 기차역 플랫폼은 한낮처럼 환하다. 다른 그림에는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흰 천을 두른 여인이 새와 꽃으로 꾸민 모자를 쓰고 있다. 폐허가 된 도시 속에 나체의 여인들이 서 있고, 신사복 차림의 남자가 어두운 문간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인물과 건축물은 실제처럼 정교한데, 한데 놓인 풍경이 꿈속처럼 낯설다.
폴 델보(1897~1994)의 ‘크리스마스의 밤’(1956), ‘밤의 미녀들(저녁의 희극)’(1936), ‘잠든 도시’(1938)다. 르네 마그리트와 함께 벨기에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그는 자신만의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고전적인 필치로 묘사해 꿈을 현실로 옮긴 듯한 독특한 회화를 그렸다. 한국에선 작품을 접하기 쉽지 않은데, 뜻밖에도 서울 강남의 오피스 타운에서 세 점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삼성역 인근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현대회화 하이라이트: 시대의 초상’이다. 글로벌세아 소장품에 외부 대여작을 더해 유명 현대미술 작가 14명의 작품 20점을 모았다. 델보 세 점은 모두 글로벌세아 소장품이다.
의류 제조·수출기업 세아상역을 모태로 하는 글로벌세아는 일반에는 낯선 이름이다. 창업자 김웅기 회장이 미술품 수집가로 더욱 주목받았다.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우주’(05-IV-71 #200·1971)를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인 132억원에 낙찰받은 인물이다. 올해도 미국 미술전문지 아트뉴스의 ‘세계 200대 컬렉터’ 명단에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과 함께 올랐다. ‘우주’의 소장자라는 이력과 함께 한국 근현대미술의 주요 작품과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등을 수집한 인물로 소개됐다.
윌렘 드 쿠닝 ‘무제 XIX’(1984).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을 지낸 박미화 독립 큐레이터는 작품 목록을 받고 이들 작가의 그림을 한국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렜다고 했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주요 작가 윌렘 드 쿠닝의 그림도 국내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그의 ‘무제 XIX’(1984)는 높이 2m가 넘는 흰 화면 위에서 붉고 푸른 선이 리본처럼 휘고 엇갈린다. 격렬하게 물감을 쌓아 올리던 이전 작업과 달리 색과 형태를 덜어낸 말년의 대작이다.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은 익숙하지만, 시기와 형태가 다른 회화들을 나란히 살필 기회는 흔치 않다. 호박을 본격적으로 그리던 시기의 ‘호박’(1981)과 크고 작은 호박 세 개가 어우러진 ‘호박[TWAQN]’(2015)이 나왔다. ‘인피니티 도트(AB)’(2003)의 화면을 빼곡히 채운 점들과 ‘실버 인피니티 네트’(2014)의 은빛 그물도 함께 볼 수 있다.
마르크 샤갈, 데이비드 호크니, 조지 콘도, 니콜라스 파티, 살보, 아드리안 게니 등의 작품을 통해 초현실주의부터 추상,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현대회화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2027년 1월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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