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아픈 친구들…그래도 크게 웃었다 [양희은의 어떤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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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 가수
6개월 만에 동창회에 나갔다. 반가운 얼굴 중 몇몇이 아파서 몇달 입원하고 치료받고 약이 독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놓는다. 우리는 왜 만나면 온통 아픈 얘기만 할까? 팔, 다리, 눈까지 여러 번 수술한 친구에게 순진무구한 다른 친구가 묻는다. 만약에 팔, 다리, 눈 중에서 무엇을 다치면 그나마 나을까? 질문한 덕에 다 같이 웃었다. 자기가 아픈 그곳이 아니면 괜찮지 않을까? 옛말에 몸이 천냥이면 눈이 900냥이랬잖아. 그게 아니고 눈이 930냥이란다. 깁스도 많이 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는 친구도 눈 아픈 게 제일 힘들다고 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뭐든 다 귀찮다며 나 하나 추스르고 살아남기도 힘들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도 친구들 만나 조금씩 먹으니 오늘은 괜찮았단다. 여름 내내 병원생활에 지친 두 친구는 나더러 환자 축에 들지도 않으니 빠지란다. 항암할 때 몸이 느끼는 것처럼 말초신경이 저릿저릿하고 괴로운데 나가서 여기저기 다니고 싶단다. 의사는 기흉수술 한 후 준비를 하시는게 좋겠다 했다는데, 의사 선생님의 기질이 환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낙관적인 의사와 비관적인 의사. 친구는 나 이래 봬도 엄청 질긴 사람이라고 답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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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서 온다던 친구 소식을 기다렸었다. 얼마나 재미있게 가을을 만끽하길래 이렇게 소식이 없나 했더니 전화가 왔다. “나, 서울 못 갔어. 우리 농장서 피나 바우쉬 무용단에 속한 교포랑 그 동료들 초대해서 공연을 주선했었어. 60명을 초대하기로 했는데, 공연 이틀 전에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여 공중에 떴다가 도로에 떨어지면서 뇌출혈에 갈빗대도 두대 부러졌어. 그래도 그간 운동 열심히 한 결과가 있더라고. 팔, 다리 튼튼해서 이 정도래. 뭐가 뜨뜻한 게 흐르더니 그게 온통 피였어. 감사하더라고. 가고 싶은데 다 가봤고 입고 싶은 옷, 들고 싶은 백 다 누렸고 못 해본 게 없어. 죄다 누리고 살았어. 솔직히 가도 후회 없어. 충분히 살았어. 재활도 병원에서는 해줄 게 없대. 걸음도 잘 걸으니까…. 그런데 병원엔 전부 외국인이더라. 독일 의사를 볼 수가 없어. 게다가 80·90대 노인네들이 도움이 필요해서 내가 일하다 보니(본래 간호사였다) 더는 쉴 수가 없어 그냥 퇴원했어. 농장에 와서 농사짓고 깻잎, 파, 부추가 얼마나 잘 됐는지 김치 담갔어.” 본래 뇌경색이 있어서 식단 조절과 운동을 군인처럼 지켜온 친구다. 통화 중에 더듬거리거나 어눌한 게 없어 다행이었다. 주말 내내 심각하게 아픈 친구들 얘기를 들은 데다 국제전화로까지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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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말 10월 초가 분주했다. 45년 만에 옛 친구의 고향, 오카야마와 구라시키를 다녀왔다. 1981년 그때 횡단보도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음악 소리가 들려 신기했다. 혹시라도 신호를 보지 못할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길가엔 쓰레기봉투가 엄청 쌓여 작은 산을 지었기에 물어보니, 까마귀와 고양이가 뜯어놓으니까 동네별로 요일을 정해 내어놓는단다. 친구의 안내로 구라시키로 가는 길에 집 한 채가 거꾸로 서 있었다. 재밌고 뚱딴지같은 발상이었다.
오카야마공항에서 렌터카(내가 운전하는 것 아님)로 구라시키로 직행했다. 예전보다 정리된 느낌이었고 내 어린 날의 풍경 속에 들어있는 적산가옥들이 온갖 물건을 팔며 줄지어 있었다. 우리는 뒷골목 메밀국숫집을 예약하고 들어가서 메밀 반죽을 써는 모습을 넋을 놓고 구경했다. 어쩌면! 보통 메밀국수의 3분의 1 정도 굵기로 중식칼 같은 네모난 도구로 정교한 자기만의 리듬으로 썰어낸다. 작업장 앞은 큰 통유리라서 달인의 솜씨를 구경할 수 있었다. 숙련된 달인의 흔들림 없는 자세.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만만히 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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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시키 강변은 옛날 쌀과 목화 등을 보관했던 창고들이 쭉 늘어섰는데 옛 건축양식이 잘 보존되어 레트로 감성이 충만하다. 땅거미가 지면 강 주변 건물의 불빛들이 반사되어 더 아름답다. 이 골목 저 골목 스치듯 지나다 마스킹 테이프를 파는 가게에 들어가 구경하고(하나하나 찬찬히 봐야 한다) 몇 개 샀다. 다이어리 꾸미기(다꾸)와는 거리가 멀지만 작은 소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소면 만큼이나 얇은 메밀국수와 쯔유는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귀한 맛이었다. 타네(씨앗이란 뜻의 가게이름)에서 마스킹 테이프를 사고 강변 의자에 앉아 기비당고를 먹으며 강 너머 저편 하늘의 석양을 바라보니 금세 ‘개늑시’가 됐다. 이런 어둑어둑함이 좋다. 칠흑 같은 캄캄함보다 개인가? 늑대인가? 분간이 어려운 해 질 녘, 왠지 돌아갈 집 생각이 진하게 난다. 떠난 지 하루 만에 무슨 집 생각? 할 테지만 돌아갈 집이 있으니까 떠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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