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요약 대신 ‘벽돌책’과 맞짱…“한권 읽어도 열권 읽는 효과” [.txt]
책으로 이어진 사람들 l 울산 인문 독서 공동체 ‘망원경’
혼자 읽기 어려운 철학책과 ‘맞짱’
밀도 높은 발제·토론으로 책 소화
인프라 부족 지역서 ‘문화 숲’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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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요. 말할 수 없는 영역인 윤리, 예술, 종교적 경험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김수복)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제자잖아요. 러셀처럼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태도, 특히 추상적인 것까지 분석하려는 데 환멸을 느꼈다고 봐요. 전 비트겐슈타인이 (예술 등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존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어요.”(최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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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경험을 내 경험이라고 얘기하면 되는데, 보편적 도그마로 만들려고 하면 문제가 되죠.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종교적으로도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류태길)
“저는 불교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봤어요. 부처님의 제자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윤회라든가 내세라든가 이런 것들에 질문이 많았다고 해요. 그때 부처님은 침묵하셨다고 해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과 맥락이 닿아요.”(김미경)
광복 81주년을 맞은 지난 15일, 울산 중구 울산시립미술관 지관서가 1층에는 독서 모임 ‘망원경’ 회원 11명이 탁자를 둘러싸고 빙 둘러앉았다. 한 철학자의 말에 관한 생각도 이처럼 다채로웠다. 이정우 철학자가 쓴 800쪽에 가까운 벽돌책 ‘세계철학사 4: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의 5장을 읽고 분석철학의 사유를 톺아보는 자리였다. 시인, 청소년 상담사, 목사, 의사, 한약사, 약사, 기자, 주부, 노인복지사 등 하는 일도 제각각인 이들은 프레게, 러셀, 오스틴, 콰인 같은 철학자의 이름을 쉴 새 없이 언급했다.
‘망원경’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비영리 단체다. 독서 입문자를 위한 ‘훌쩍’ 과정부터 심화 과정인 ‘함께’ 과정까지 있다. 이날은 ‘함께’ 과정으로, 회원들은 무려 4년 동안 한달에 한번씩 모여 ‘세계철학사’ 1권부터 4권까지 읽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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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공부하진 않았어요.”(김수복)
철학 전공자들의 세미나를 방불케 하는 이 독서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빡센 발제”다. 저자나 전문가를 초빙해 강연을 수동적으로 듣기보다, 회원들이 직접 발제하고 토론한다. 그래도 의문이 남으면 그때 저자나 전문가를 초대해 궁금한 점을 묻는다.

이날 김수복씨가 준비한 발제문은 A4 용지 10쪽에 달했다. 현대 논리학과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언어철학을 정리하고 토론할 질문도 담았다. 김씨는 “1년 전에 읽을 책과 발제 순서가 정해지는데, 나는 6개월 전부터 발제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며 “그 과정에서 다른 책들도 찾아 읽게 돼 공부가 많이 된다”고 말했다.
김씨의 토론 질문 중엔 “여러분에게 ‘사유’란, ‘철학’이란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질문도 있었다. 11명의 회원은 11가지 다른 답을 내놨다. 조미정씨는 “순간순간 경험하는 현상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삶의 이정표”라고 했고, 이향숙씨는 “질문하고 사물을 낯설게 보기”라고 답했다. 윤미혜씨에게 철학은 “자신에게 갇히지 않는 것”이었고, 김도현씨에게는 “세상과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자세”였다.
‘망원경’은 2013년 40대 중반에 접어든 친구 네명의 독서 모임에서 출발했다. 초대 회장 최미선씨는 “빅터 프랭클이 ‘망원경으로 보면 렌즈 바깥 세상이 보이고, 만화경으로 보면 렌즈 안 세상만 보인다’고 했다”며 “독서를 통해 렌즈 바깥의 세상을 보자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건강한 사회의 첫걸음, 개인의 철학화’라는 모토도 세웠다. 시민이 주체가 돼야 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네명이 시작한 모임에 지인들이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고,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밴드 회원은 현재 424명에 달한다. 3대 회장을 지낸 이은민씨는 “코로나 기간에도 줌으로 모임을 계속했다”며 “칸트, 스피노자, 니체 등 혼자 읽기 어려운 책들을 함께 읽었고, 어려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어려운 책을 굳이 시간을 내어 함께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미경씨는 “혼자 읽으면 한권의 책을 읽는 것이지만, 책을 읽고 열명의 회원과 얘기를 나누면 열권의 책을 읽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김수복씨도 ‘망원경’의 선정도서 ‘모모’를 읽었을 때를 떠올렸다. “‘이 정도의 책은 내가 잘 알지’라고 생각했는데 모임에 와보니 열개의 주제와 생각들이 나오더라고요. 그때 겸손한 청자, 독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혼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던 책도 읽게 된다. 이향숙씨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사놓고도 읽지 못했다. “망원경에 와서 철학자들 이름도 알게 되고 생각하는 방법도 배우면서 제 가능성이 확대됐어요. 지난주에 ‘얼굴상’ 부분을 다시 읽어봤는데 예전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류태길씨는 “혼자 읽으면 이해되지 않는 책도 여기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읽으면 읽히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함께 독서하며 개인의 사유만 넓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망이 생기고, 그것이 또 하나의 ‘문화 인프라’가 된다.
울산은 1960년대 산업화 이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며 급성장한 도시다. 사이트앤페이지가 2024년 작성한 ‘울산 공간환경과 인문·사회적 특성 분석 보고서’를 보면, 울산은 광역시라는 위상에 비해 문화시설, 특히 도서관이 부족하고 도서관 접근성도 전국 6개 광역시(2022년 기준) 가운데 가장 낮다고 진단했다. 이런 도시에서 독서 모임은 시민들이 문화의 향기를 누리고 지역에 대한 소속감을 키우는 ‘문화 숲’의 역할을 한다. 전북 정읍 출신인 최미선씨는 “망원경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울산을 내 고향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윤미혜씨는 “함께 나이 들어가고,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모임에 나온다”고 말했다.
궁금한 것을 물으면 인공지능이 지식과 정보를 척척 정리해주는 시대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책을 손에 드는 걸까. 이은민씨는 “책을 읽으면서 결국 내 속에 있는 질문을 끄집어내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발제 맡은 책을 7번이나 읽고 필사까지 했다. 그 과정을 거쳐야 책이 나에게 소화되는 느낌이 든다”고 덧붙였다. 최미선씨는 이를 ‘근력’에 비교했다. “머리로 운동법을 알아도 직접 운동을 해봐야 알듯이, 반드시 책과 내가 맞짱을 떠야 해요. 인공지능이 요약해준 것만 보면 근력이 형성되지 않아요. 책을 스스로 읽으며 생각해야, 자신의 삶에 문제가 생겼을 때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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