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도체 관세 협박 왜?… 자국 내 투자 끌어내려는 협상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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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2026년 9월 초, 반도체 관세 카드를 다시 꺼냈다. 미국 밖에서 반도체를 생산해 미국 시장에 들어오려면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다. 러트닉 장관은 미국 내 생산 여부에 따라 관세를 달리하는 ‘반도체 표적 관세’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 생산시설을 지으면 관세를 깎아주고, 국외에서 생산하면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러트닉 장관은 이런 관세정책이 미국 내 투자를 끌어냈다고 주장했다.
관세 매기면 미국이 손해인데
미국은 대만과의 무역협정에서 미국에 생산시설을 짓는 반도체 기업의 경우 공장을 세우는 동안 계획 생산량의 2.5배, 완공 이후 1.5배까지 관세를 면제하기로 했다. 티에스엠시(TSMC)는 애리조나주에 265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마이크론은 2500억달러 규모의 메모리 공장을 짓고 있는데, 이것이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작동하는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메모리 반도체에 관세를 매기면 손해를 보는 건 미국이다. 한국 메모리 회사들이 전세계 시장을 과점하고 있고 메모리 공급 부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사는 사람이 아쉬운 시장이다. 미국 정부가 관세를 매기면 메모리를 사가는 미국 기업이 부담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비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메모리는 AI 데이터센터뿐 아니라 피시(PC)와 스마트폰, 노트북에도 들어간다. 관세는 한국 수출 기업이 아니라 미국 수입 기업이 내는 것이고 결국 미국 소비자가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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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트닉 장관이 강조한 것은 사실 관세보다 미국 내 생산이다. 관세는 반도체 수입을 막는 장벽이라기보다 미국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협상 수단이다. 한국은 2025년 반도체 관세에서 최혜국대우를 약속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불리한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대만이 혜택을 받으면 한국도 그 정도 대우를 해주겠다는 게 당시의 약속이다. 하지만 미국이 그 약속을 지킬지는 미지수다.
사실 한국은 미국에 가장 많은 공장을 짓고 있는 국가다. 미국 땅에 새로운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그린필드 투자’(Greenfield Investment)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1등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엘지(LG)에너지솔루션 등 한국 대기업들은 정보기술(IT), 자동차, 배터리 등 첨단 공장을 미국에서 운영하고 있다. 한국 기준으로 봐도 국외 투자의 50% 이상이 미국이다. 지금도 미국에 투자해서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는데 반도체 공장까지 지으라고 윽박지르니 억울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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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미국의 반도체 관세 협박을 무시할 수는 없다. 미국은 자국의 산업 패권이 흔들린다고 판단하면 시장 논리보다 국가 전략을 앞세운 전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대 미-일 반도체 협정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원조는 인텔이다. 지금은 인텔이 중앙처리장치(CPU) 등 시스템반도체 기업이지만 창업할 때 모태 사업은 메모리 반도체였다. 1970년대 후반 일본 정부를 중심으로 일본전기(NEC), 도시바 등 일본 전자기업들은 반도체 산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일본 전자기업들은 반도체를 만들어 그룹 안의 가전, 통신 부문 등이 사는 방식으로 초기 경험을 쌓았다. 또 일본 정부는 관치금융을 통해 저리의 자금을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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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모리 회사들의 진격은 매서웠다. 1978년 세계 디램(DRAM) 시장의 약 70%를 차지했던 미국 기업의 점유율은 1986년 20% 안팎까지 추락했다. 같은 기간 일본 기업의 점유율은 30% 미만에서 75% 이상으로 치솟았다.
1980년 미국 반도체 시장을 뒤흔든 보고서가 발표됐다. 리처드 앤더슨 휼렛패커드의 컴퓨터부문 부사장은 미국과 일본 주요 반도체 기업에서 공급받은 16K D램 약 30만 개의 불량률을 비교한 결과를 공개했다. 일본 제품의 수입 검사 불량률은 사실상 0%에 가까웠고 미국산 제품은 훨씬 높은 고장률을 보였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품질 자체에서 일본이 앞선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됐다.

1980년대 중반 반도체 불황이 닥치자 일본 기업들은 오히려 대규모 생산 능력을 활용해 가격경쟁을 벌였다. 인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미국 메모리 기업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인텔의 고든 무어 회장과 앤디 그로브 사장의 대화가 나왔다. 그로브는 만약 이사회가 자신들을 해고하고 새로운 최고경영자(CEO)를 데려온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다. 무어는 D램 사업을 접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로브는 자신들이 문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 결정을 직접 하자고 했다. D램의 창시자인 인텔은 D램 사업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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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반도체 협정
급기야 일본 후지쓰가 실리콘밸리의 상징인 ‘페어차일드 반도체’ 인수를 시도하자 미국 국방부가 나섰다. 핵심 방산 공급망까지 넘보는 일본 메모리 회사를 두고 미국 사회는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고 표현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주요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는 공정시장가격이다. 미국은 일본산 반도체의 기준가격을 산출한 뒤 그보다 낮게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둘째는 일본 시장 개방이었다. 일본 내수시장의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20%까지 높이는 목표가 설정됐다.
이는 막 세계 무대에 진입한 삼성전자, 금성반도체 등 한국 메모리 기업들에 엄청난 기회가 됐다. 일본 메모리 회사들은 가격을 낮출 수 없지만 한국 회사들은 낮출 수 있었다. 일본 메모리를 저렴하게 살 수 없게 된 미국 PC 회사들은 한국산 메모리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내주기로 했던 내수 20% 시장도 한국 메모리들은 외국산이라는 명분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1985년 미국과 일본의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두 배 넘게 오르자 한국 메모리 회사들은 전세계 시장에서 일본 회사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전세계 반도체 시장은 재편됐다. 메모리 반도체를 포기한 미국 반도체 회사들은 CPU 등 시스템반도체 설계 분야로 특화됐다. 대만은 미국이 설계한 반도체를 생산해주는 파운드리 산업이 자리 잡았다. 한국은 범용 메모리 시장을 장악했고, 일본은 반도체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됐다. 대신 반도체 소재·부품·장비를 만들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를 산업안보 문제로 받아들일 때 시장이 얼마나 크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 장면이다.
미국은 한국의 동맹국이자 최대 교역국이다.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등 반도체 고객도 대부분 미국에 있다. 미국 내 생산에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도 없고 애써 무시할 필요도 없다. 결국 관세율보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서 어떤 산업 지도가 만들어지느냐다.
삼성전자는 1996년부터 텍사스 오스틴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2026년 말 가동을 목표로 테일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2026년 8월 말 인디애나주에 패키징 공장 착공식을 열었다. 미국에 추가로 공장을 짓는 것도 선택 가능한 대안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미국에 전 공정 팹을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기꺼이 할 의향은 있지만 적합한 부지를 찾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말했다.
글로벌 메모리 시장은 앞으로 막대한 신규 생산 능력을 필요로 한다. 신규 공장 부지를 선정할 때 미국을 배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 대신 미국이 원하는 것을 주는 만큼 우리가 원하는 것도 받아내야 한다. 차세대 기술 개발, 대규모 생산의 중심은 한국에 두면서 증가하는 미국 수요에 대응할 신규 생산 능력 일부를 미국에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값싼 전력과 용수, 세제 혜택은 기본이고 한국에서 생산하는 반도체에 대한 안정적인 미국 시장 접근을 요구해야 한다.
미국의 필요를 이용하는 투자
글로벌 메모리 시장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과점 체제가 된 지 10여 년이 흘렀다. 메모리 산업의 특성상 새로운 경쟁자가 출현하기 어려웠다. 최근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등 중국 메모리 회사들이 중국 내수 수요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반도체 시장 재편은 이미 시작됐다. AI 산업 발전과 보호무역주의는 새로운 시장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중장기적 측면에서 공급망 지도를 그려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요구에 밀려가는 투자가 아니라, 미국의 필요를 이용하는 투자가 돼야 한다.
권순우 삼프로TV 본부장 soon@3protv.com
권순우는 경력 15년의 현직 기자다. 금융, 산업 등 다양한 영역을 취재하며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머니투데이방송’을 거쳐 현재는 ‘삼프로TV’에서 ‘압도적 권순우: 압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격변과 균형’ ‘수소전기차 시대가 온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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