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 권력의 갑옷이 될 때 [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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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네스 모슬러(강미노) |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 정치학과 교수
얼마 전 연구실에서 한 ‘평화단체’로부터 전화를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씨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보태 달라는 요청이었다. 유무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속 수사의 ‘비례성’만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단체는 다름 아닌 이만희씨 본인이 세운 국제조직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의 독일 지부였다. 신천지는 독일에서도 결코 낯선 이름이 아니다. 몇해 전부터 독일 내에서 공격적으로 포섭된 신도들이 겪는 심리적·육체적 착취를 다룬 보도가 잇따랐다. 피해자 중에는 대학생과 젊은이가 유독 많다.
그러나 이 조직이 저지르는 착취와 기만은 피의자의 기본권 문제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인권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혐의가 아무리 무겁든, 정치적 성향이 어떠하든, 사회적으로 얼마나 미움받든 상관없다. 사람에 따라 인권을 달리 적용하는 순간, 보편성이라는 토대 자체가 무너진다. 민주적 법치국가의 정당성은 최고 권력자든 지탄받는 인물이든 공정하고 비례에 맞게 대우하는 데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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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비례성의 저울은 양쪽으로 기운다. 방대한 조직과 자원을 쥔 인물일수록 증거를 없애거나 증인에게 손을 뻗칠 위험은 오히려 커진다. 엄격한 구속과 접견 제한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다. 정치 과정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처럼 중대한 범죄가 걸려 있을 때, 흔들림 없는 수사라는 공익은 특별히 무겁다. 고령이라는 사정도 다르지 않다. 수용 시설에서 기본적 의료가 보장되는 한, 그것이 사법적 안전장치를 통째로 풀어줄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만희씨의 구속을 심리한 법원이 ‘증거인멸의 우려’를 든 것도 이 대목이다. 요컨대 그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과 그를 책임에서 빼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가 손수 세운 단체가 인권을 앞세워 그를 빼내려는 것은 인지상정으로는 이해되나, 법치로도 상식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이 기이한 연락 앞에서 필자는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의 같은 뒤집힘을 떠올렸다. 지난해 안창호 위원장은 자신을 임명한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안팎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다. 취임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적법 절차를 지키라 했을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12·3 내란에는 말을 아끼던 기구가 유독 그 권력자의 절차적 권리엔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을 권력으로부터 지키라고 만든 기구가, 권력자를 책임으로부터 지키는 데 동원된 모양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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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이 일은 부끄러울 뿐 아니라 위험하다. 현직 인권위원장을 끌어내리는 문턱은 일부러 높게 설계돼 있다. 정권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위원회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방패가 이제는 거꾸로 위원회를 사실상 사유화한 사람을 지키는 데 쓰이고 있다.
2001년 김대중 정부에서 출범한 이래, 인권위가 서 있던 자리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국가보안법 조사를 받던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가 포승줄과 수갑에 묶인 채 신문을 받던 2003년 가을은 그 시절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가의 압도적 물리력 앞에 선 개인들 편에서 인권위는 국가를 향해 목소리를 냈고, 검사 조사실의 수갑·포승 같은 계구 사용은 끝내 위헌으로 단죄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인권위가 지킨 것은 힘없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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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인권은 약한 이가 강한 힘 앞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벼려진 방패다. 그 방패가 방향을 틀어, 그것도 인권을 지키라고 세운 기구의 손이 힘 있는 자의 책임을 막는 갑옷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바깥의 공격이 아니라 바로 그 안에서부터 허물어진다. 가장 은밀하고, 그래서 가장 위험한 방식이다. 그때 그것은 더 이상 만인의 인권이 아니라, 한 사람만의 특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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