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대변자로 시대 웅변, 일제 검열에 점차 순응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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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생후 처음으로 신문기자를 부러워하고 또 신문기자가 되기를 바라게 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제 때 조선일보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활약했던 기자 김을한(1905~1992)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운명의 그날’에 대한 사연을 풀어놓은 것은 1960년 11월 펴낸 책 ‘사건과 기자’(신태양사 출판국, 판매가 700환)를 통해서였다. 일본 간토 지역에서 규모 7.9의 대지진이 일어난 지 보름 남짓의 시간이 흐른 1923년 9월18일, 서울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도쿄 유학생 출신들이 모여 만든 신극 공연 모임인 토월회의 2차 공연이 열렸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저마다 독특한 삶의 궤적을 그려 가게 되는 김복진·김기진 형제, 박승희, 안석주, 박승목, 이서구, 김을한 등으로 구성된 토월회는 첫날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종로의 수은동(현재의 묘동)에 있던 청요릿집인 ‘열빈루’로 자리를 옮겨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흥에 겨운 젊은이들이 ‘부어라 마셔라’ 해 대는 통에 “요릿집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러웠다.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지만, 여흥은 깊어질 뿐이었다. 이런 자리에 노래가 빠질 리 없었다. 당시 큰 인기를 모았던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 나오는 아리아인 ‘투우사의 노래’가 가게 안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느닷없이 방문을 열어젖히는 이가 있었다. 신고를 받고 들이닥친 종로경찰서 소속 일본 순사였다. “안면(安眠)방해죄로 전원을 검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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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술을 마시고 좀 떠들었기로 상관이 무엇이냐”며 대들었지만, 경찰 권력의 위세를 당해낼 순 없었다. 결국, 달 밝은 가을밤 종로통을 따라 조선 청년 수십명이 지금의 서울 와이엠시에이(YMCA) 건물 옆에 있던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이들을 인계받은 일본 경부(한국 경찰의 경감쯤 되는 계급)는 귀찮은 듯 “이 사람들은 무어야”라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함께 끌려온 무리들 가운데 앞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다. 이후 조선일보·중외일보 등에서 민완 기자로 이름을 날리지만, 일제 말기 매일신보 편집국장으로 말년을 더럽히게 되는 정인익(1902~1955)이었다. 그는 동시대 남성들에 대한 깐깐한 인물평으로 유명하던 배우 복혜숙(1904~1982)이 “일정 때 제일의 멋쟁이”라고 꼽았던 미남자이기도 했다. 이 무렵 도쿄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해 매일신보 사회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직을 서던 일본 경부와 안면이 있었는지 테이블에 반쯤 걸터앉은 채 말을 걸었다. 심지어, 반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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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사하고는 이야기가 아니 되므로 일부러 본서까지 따라왔다. 젊은 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좀 떠들기로서니 검속할 것이 무엇이 있나. 즉시 석방하는 것이 어때?”
“딴은 그래. 당신 말도 있고 하니 그럼 오늘 저녁은 그대로 돌려보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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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경을 경탄의 눈으로 지켜보던 김을한은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뒤 출판한 책에서 “신문기자를 부러워하고 또 장래 사회에 나가면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가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딱 하나 “신문기자는 무관의 제왕이고 신문은 사회의 목탁”이며, 기자만이 “무시무시하고 지긋지긋하던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일본 경찰에 일대일로 대항할 수” 있는 존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볼 때 “해방 전의 신문기자는 (일제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인”이었다.
하지만, 김을한의 믿음과 달리 조선의 ‘유일한 자유인’들이 진정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가 1920년 1월 동아일보·조선일보·시사신문 등 세 한글 신문에 발행 허가를 내준 것은 조선인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언론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가 좀 더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일종의 ‘숨구멍’을 뚫어준 것에 불과했다. 조선의 기자들은 3·1운동 이후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1858~1936) 조선 총독이 내세웠던 이른바 ‘문화 통치’의 틀 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해 비판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는 순간, 어김없이 혹독한 철퇴가 내려졌다.
이런 근본적 한계 속에서도 ‘조선의 기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다하려 애를 썼다. 박찬승 한양대 명예교수는 저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3―언론운동’(2009)에서 이 무렵 한글 신문이 △민족의 의사를 대변하고 △민족운동을 지원하며 △사상과 문화의 발전을 도모하고 △언론 자유의 획득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고 짚었다. 실제로 한글 신문의 아주 짧은 ‘전성기’였던 1920년대엔 각 신문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치열하게 경쟁했다. 민족주의 우파 세력을 대변한 동아일보는 독립을 위해선 먼저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실력양성론을 주장했고, 조선일보는 민족주의 좌파(비타협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한 신간회 운동을 이끌었다.
평범한 조선인들은 그런 신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그나마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는, 조선인이 가진 사실상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잡지 ‘동광’의 1931년 12월호에 실린 ‘조선신문계 종횡담’이라는 글에는 한글 신문을 향한 당대 민중들의 정서가 날것 그대로 표현돼 있다. “조선의 신문이 그같이 민중에게 주는 영향이 큰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문이 합법적으로 조선인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대표하는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일세. 즉, 유일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지도 기관이요 순전히 조선 사람의 손으로 경영되는 유일한 기관이란 말일세. 그래서 민중도 이것이야말로 나의 물건이요 나를 위하는 물건이란 생각을 가졌고…”, “(창간 초기) 동아일보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대단해 기자가 취재차 시골에 내려가 여관에 들면 여관에선 기자가 와 묵는 것만도 영광이라고 해서 숙박료를 안 받을 지경이었다.”(조용만·매일신보 학예부장 역임, ‘울 밑에 핀 봉선화야’,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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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조선의 기자’가 된 이들은 현역으로 활동하던 1920~1930년대는 물론, 해방 이후인 1950~1980년대까지 여러 단행본이나 잡지 등을 통해 적잖은 회고담을 남겼다. 일본 경찰의 부당한 조처에 맞서 조선 민중을 보호한 얘기, 경찰서에서 수사 자료를 훔쳐내 큰 특종을 한 얘기, 독립운동가들을 학대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서 고등계의 미와 와사부로(1884~1968) 경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얘기, 경찰보다 먼저 용의자의 집에 도착해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얘기, 심지어 출장지에서 마감 시간에 늦지 않게 기사를 쓰다 바지에 똥을 싼 얘기까지 각종 무용담이 차고 넘친다. 1930년대 초 현역 기자들이 함께 쓴 잡지 ‘철필’을 보면, 이들은 ‘기자는 늘 현장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자들이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시기 직업 기자의 표본으로 여러 신문사 사회부장을 역임했던 유광렬(1898~1981)은 “종로서 외근을 담당했을 때”에는 “관하 파출소까지 모조리 들러서 그 부지런함에는 모두들 탄복함을 마지않았었다”는 일화를 남겼고, 조선일보 사회부장 시절엔 매일 ‘기사가 없다’고 보고하는 서범석(1902~1986)에게 “기사가 없는 것도 기사”라는 말로 분발을 촉구했다.

이들은 당대의 엘리트들이자, 시대의 날카로운 관찰자들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식민지 조선’이라는 거대한 독 안에 갇힌 쥐였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붓을 휘둘렀다간 기자 개인은 혹독한 처벌을 당하고, 신문사는 삭제·압수·발행정지·발행금지 등 행정 처분을 감수해야 했다. 이 시기 신문 검열을 담당했던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부터 가장 가벼운 ‘삭제’ 처분만 받아도 신문사는 돌고 있는 윤전기를 멈추고 동판에서 기사를 긁어낸 뒤 다시 기계를 돌려야 했다. 가뜩이나 재정이 어려워 사원들 월급도 밀리고 있던 신문사들은 “1~2시간 만에 무려 500~600원의 손해”(유광렬, ‘사회면 편집에 대한 의견 고심담’, 1930)를 입게 되는 이 고통을 점차 꺼리게 된다.
삭제·압수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발행정지(정간)는 신문사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정간을 당하면 판매 수입이 끊기고, 직원들은 월급을 받을 수 없었다. 애써 구축했던 독자망도 흩어지기 일쑤였다. 장강대하(長江大河) 같은 명문으로 ‘경성의 지가’를 올렸던 조선일보 주필 민세 안재홍(1891~1965)은 자신이 쓴 사설 ‘제남사건의 벽상관’(1928년 5월9일치)으로 신문사가 정간을 당하게 되자 “전등불도 희미한 견지동 조선일보사 2층 편집실에서 모든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침통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나 한 사람의 잘못으로 여러분들이 영향을 입게 되어서.”(유광렬, ‘기자 반세기’, 1969) 이 일로 조선일보는 무려 133일 동안 신문을 내지 못했고, 안재홍은 8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다. 그나마 버틸 체력이 있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각각 네 차례 정간을 당하고도 살아남았지만, 자본력이 약했던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8월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단 한 차례 신문을 못 내게 되자 결국 폐간을 선택하게 된다.

결국, 조선의 신문들은 1930년대에 들어서며 조금씩 순치되는 길을 걷는다. 한글 신문에 대한 검열을 담당하던 다쓰타 기요타쓰(1890~1942) 총독부 도서과장은 식민지 시대 조선 경찰의 소식지인 ‘경무휘보’ 1931년 1월치에 ‘1930년 조선출판계의 회고’라는 매우 흥미로운 글을 남겼다. “민족의식에 휩쓸려 날뛰던 곡필도 계급의식에 편승해 흘러가던 무문(舞文·왜곡된 글)도 또 민중의 생활고를 우는 소리로 열거하던 논설도 무엇 하나 조선민족의 발전과 향상에 도움될 게 없다는 사실을 점차로 깨닫게 됨에 따라 (중략) 지난해 학생사건(1929년 광주학생운동) 후 갑자기 생각을 바꿔 그 필망(筆鋩·붓끝)을 고쳐 온건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조선의 기자들 역시 이런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1929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는 주요한(1900~1979)은 “초창기의 일간신문은 이틀이 멀다 하고 발매금지·압수처분을 당했고, 그때마다 배달원들이 뜰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며 “그러나 내가 편집국장이 될 무렵에는 회사의 방침이 되도록이면 압수를 당하지 아니할 정도에서 논설이나 기사를 쓰라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30년대 들어 본격화되는 이런 현상을 ‘언론의 상업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과거 저항의 상징이었던 압수나 정간이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업 경영을 위해서는 가능한 피해야 하는”(‘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동아일보의 선택’, 2005)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조선의 기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사명을 다하려고 하면 신문의 ‘존재의 기반’이 위태로워지고, 반대로 살아남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면 언론인으로서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는 딜레마 속에서 시름해야 했다. 이 양자 선택의 길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어쨌든 기업(언론 역시 기업이다)은 살아남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자본의 논리였다.
그와 동시에 일본은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늪에 빨려 들게 된다. ‘검열 기준’ 역시 점점 강화됐다. 누군가는 자발적인 친일의 길을 택했고,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했으며, 이런 치욕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일부는 신문사를 나와 붓을 꺾었다. 그리고 마침내 식민 권력은 1939년 말에 이르면, 전쟁 수행을 위해선 지금보다 더 철저한 언론 통제, 즉 한글 신문의 폐간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만약,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1940년 8월 강제로 문을 닫지 않았다면, 더 철저히 몸을 더럽힐 수밖에 없었고, 해방 이후 화려한 복간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두 신문이 사라지자 ‘조선의 기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제 매일신보로 옮겨 더 지독한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식민지 조선에는 저마다 강력한 개성을 뽐내던 수많은 기자들이 있었다. 동아일보·조선일보·중외일보라는 세 신문을 제 손으로 키워낸 이상협(1893~1957) 같은 빼어난 직업 신문인이 있었고, 문장 속에 우국충정의 감정을 녹여낼 줄 알던 안재홍 같은 위대한 언론인이 있었으며, 현장에서 좋은 기사를 건져 낼 줄 아는 유광렬 같은 ‘프로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빼앗긴 들에 봄이 오지 않듯, 빼앗긴 나라에 참된 언론이 활동할 공간은 없었다. 바로 이 점이 ‘한겨레 창간’이라는 승리로 귀결되는 1970~1980년대 언론자유투쟁과의 가장 큰 차이였다.
앞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일제 강점기 35년을 살아낸 ‘조선의 기자’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면서 ‘식민지기 저널리즘사’를 복원해보려 한다. 실패한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를 통해 일본이 행한 식민지배의 가혹함과 그 속에서 “일면항쟁-일면타협”(김을한) 하다 꺾여버린 식민지 저널리즘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더 생각해볼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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