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형 받은 아버지는 역적이었을까 [금자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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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여사님을 처음 뵌 날,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과 사건에 대해 질문을 하며 대강의 궁금증을 풀었다. 부족했다. 20여일 뒤 다시 집을 방문했다. 햇살이 여름처럼 따갑던 5월 초순이었다. 그러고도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여사님의 88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서울 충무로역 인근에서 약속을 잡아도 은평구 진관동 집에서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서 나왔다. 카톡 사용도 능숙했다. 최근에 잰 시력이 0.9라고 했다. 궁금한 점이 생기면 수시로 카톡을 보냈다.
(사진을 보내며) “혹시 이 사진에서 아버님을 찾기는 어려우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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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를 쓰고 보아도 어렵네요. 그래도 가장 비슷한 모습이 밑에서 두 번째 같아요.”
1949년 11월18일자 동아일보였다. 당시 신문은 달랑 2쪽이었다. 사진만 갈무리해 보낸 거였다. 흑백사진 속에선 피고들의 얼굴은 음영만 희미하게 보였다. 오른쪽에는 ‘국회남로푸락치 사건 어제 첫 공판을 개정'이라는 제목이 박혀 있었다. 첫 재판이 열린 다음날 신문 지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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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여사님의 아버지 강욱중 의원이 연루된 것은 ‘국회남로푸락치 사건’이었다. ‘남로’(南勞)란 남조선노동당, 즉 남로당을 줄인 말이다. ‘푸락치’는 표기법이 ‘프락치’로 변했다. 국회 내 남로당과 내통한 프락치 혐의를 받았다는 말이다. 지금은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불린다. 그날 신문 기사를 보자.

“이날 아침 갑작이 추어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일은 새벽부터 모여든 방청객으로 대혼잡을 이루어 대법정 내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상오 10시 법정에 나타난 김약수 외 십사명의 피고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피고 좌석에 착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심경은 자못 복잡한 듯이 좌우 관중을 슬금슬금 엿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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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시 정각 판사 검사가 입정하고 25명에 달하는 변호사의 착석하에 국회남노당푸락치사건 제1회 공판에 막이 열리었다. 먼저 오(吳) 검사로부터 국회의원 남노당푸락치사건의 전모를 밝히며 피고 십오명에 대한 죄상 즉 기소문 낭독이 있었다.
그 내용은 모다 아는 바와 같이 노(노일환), 이(이문원)를 중심으로 교묘한 책동으로 국회 내 소위 소장파를 선동하여 평화통일 운운하며 남노당의 지령을 실행 협력할 목적하에 북노당(北勞黨) 칠원칙을 지지하고 대한민국과 이의 헌법 및 국회와 정부를 부정했으며 심지어는 외군철퇴를 국회에 상정시켰으며 그것이 이뤄지지 못하자 한위(韓委)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일방 우리 대한민국의 국군을 강화하는 미군사사절단에게까지 철회하라는 것을 국회 내에서 떠들다가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모다 반국가적 행위로서 국가보안법 1, 2, 3조에 각각 해당하는 것이라는 기소문을 약 50분에 걸치어 낭독하였다.”*
여기서 ‘오 검사’란 공안검사의 대명사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제도 검사를 일컫는다. 국회프락치 사건 첫 공판에서 오제도 검사는 “피고들이 남로당 지령을 실행할 목적으로 북한 노동당, 즉 북로당의 7원칙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북로당 7원칙이란 △외군 완전 철퇴 △남과 북의 정치범 석방 △남과 북의 정당, 사회단체 각 대표로 남북 정치회의 구성 등이 포함된 7개 항목을 말한다. 북로당 7원칙 맨 앞에 있는 ‘외군 철퇴’ 주장을 국회에 상정했고 통과가 안 되자 한위, 즉 당시 한반도 총선거를 감시하고 독립정부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유엔 산하 임시기구인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에 진정서를 제출했다는 거였다. 이 행위가 국가보안법 1·2·3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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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1일 처음으로 제정돼 시행된 국가보안법 제1조는 강력했다.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아래에 의하여 처벌한다. 1. 수괴와 간부는 무기,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3. 그 정(사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3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공판은 빠르게 진행됐다. 11월17일 1차 공판이었는데 바로 다음날 2차 공판을 했다. 3차 공판은 3일 뒤인 21일이었다. 아무리 길어도 간격이 2주를 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14차 공판은 1950년 2월4일 열렸다. 이어 3차에 걸친 결심공판 끝에 3월14일 선고가 내려졌다.
(또 다른 사진을 보내며) “여기서는 두 번째 줄 왼쪽서 세 번째가 아버님 맞을까요?”
“글쎄요. 세 번째 같기도 하고, 그 오른쪽 고개 숙인 사람 같기도 해요. 사진 뒤에 보이는 방청석에는 오빠들이 있는 거 같아요?”
“정말요? 오빠들이 보이신다고요?”
“아, 아니에요. 오빠들의 얼굴이 느껴진다는 얘기였어요.”
여사님께 카톡으로 두 번째 보낸 사진은 1950년 3월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국회프락치 사건 선고공판 장면이었다. 첫 공판 사진 때보다는 뚜렷하게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맨 오른쪽에 피고인별 사진도 따로 실었는데, 강욱중 의원이 밑 부분에 나왔다. 나는 오른쪽 사진과 가장 닮은 사람을 법정 사진 속에서 고른 거였는데, 오히려 여사님은 머뭇거렸다. 재판장이었던 사광욱 판사는 이렇게 판결문을 읽었다.**
“…남로당의 노선에 부합하여 남한 지역에서 소위 외군 철퇴의 구호로써 국민의 선량이며 따라서 지도적 지위에 있는 국회의원의 그 일거일동이 국내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직위에 있음을 이용하여 국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국회 외부에서 무책임하게도 유엔한위에 대해 남로당이 주장하는 외군 철퇴를 진언하고 선전한 것은 결국 우리 동족 간에 비참한 살육전을 전개시키고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투쟁을 초래하여 우리 대한민국을 중대한 위기에 봉착케 하고 국가 변란을 야기하여 마침내는 공산 독재정권을 수립하려 함에 그 의도가 있었다고 볼 것이며….”
피고석에 앉은 13명의 국회의원을 비롯한 15명에게 최고 10년, 최하 3년의 징역형이 언도됐다. 강욱중 의원은 6년형이었다. 당시 12살 금자는 아버지가 굉장히 나쁜 역적 같은 사람이었나 해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두부 모 자르듯 딱’ 구분 짓는 ‘콩쥐팥쥐’ 같은 만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6년형이라는 말을 듣곤 ‘내가 만 18살이 돼야 아버지가 집에 오시겠구나’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나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3개월 만에 풀려났다. 한반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현 맞춤법과 관계없이 당시 기사대로 인용.
** 1970년 창간한 월간잡지 ‘다리’ 1972년 4월호 ‘국회푸락치사건 판결’,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Ⅱ’(한울, 2008)에서 재인용.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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