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업고 꽁꽁 언 한강을 건너는 소녀 [금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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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어떻게 걸어서 부산에 갈 생각을 해요?”
“그거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창밖으로 4월의 산뜻한 햇살이 쏟아졌다. 출근길에 만개한 라일락꽃을 목격한 날이었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의 한 아파트 5층이었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출구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세 정류장 만에 닿는 거리였다. 5층짜리 나지막한 아파트가 옹기종기 모여 단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입구를 찾느라 10여분을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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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님은 하얀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올린 모습이었다. 옅은 노란색 무늬가 장식된 얇은 회색 스웨터를 위에 걸쳤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여사님을 마주 보며 안쪽 의자에 앉았다. 딸 부부의 집이라고 했다. 2년 전 폐렴으로 병원 응급실에 후송돼 20여일간 입원하는 등 큰 고비를 겪은 뒤부터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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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님께 처음 전화를 걸어 “찾아뵙겠다”고 했을 때 선선히 “그러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특별한 경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에선 왠지 모를 반가움이 묻어났다.
내가 여사님에 대해 아는 정보는 단편적이었다. 2주 전 어떤 자리에서 처음 만난 게 전부였다. 사람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데, 나는 1분이 채 안 걸린 그의 짤막한 발언을 듣다가 놀랐다. 자신의 가족사 중 한 부분을 언급한 내용이었다. ‘엇, 저 말은 처음 듣는데?’ 아무도 되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전화번호를 알아내 약속을 잡았다. 상세히 전말을 알고 싶었다. 여사님은 집에서 보자며 문자메시지로 주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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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자매결연을 맺은 미군 부대에서 보육원생들을 비행기로 제주도까지 실어준다고 했어요. 그러면 제주에서 배 타고 부산으로 가려 했지.”
“비행기를 못 탔나 보죠?”
“갑자기 후퇴하게 되면서 취소됐죠. 9살 이상만 피난 가고 나머지는 남아도 된다고 했어요.”
“왜 9살이 기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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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인민군이 어린애들까지 죽이기야 하겠냐고 여긴 거죠. 그렇다고 동생들 놔두고 나만 갈 수는 없었어요.”
“같이 남으면 됐잖아요.”
“고모부를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부산에서 부산사대부속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어요. 무조건 그 교장 선생님 사택을 찾아가면 된다고 오빠들한테 들었어요. 동생들 데려가겠다고 했더니 보육원에선 ‘우린 책임지지 못하니까 알아서 가라’고 했어요.”
생애사 전체를 통째로 듣고 싶었다. 두서없이 물었다. 여사님은 성실하게 답을 해줬다. 이야기는 ‘피난 시절’로 흘러갔다.
1951년 1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이른바 중공군)이 남하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한때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맞았다가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고 전세를 뒤집었다. 반격의 기세를 올리며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닿은 것도 잠시였다. 다시 후퇴의 시간. 이제 또 서울을 넘겨주기 직전이었다.
비극에도 클래스가 있다면 여사님은 최상위였다. 고작 12살이었다. 의지할 부모는 없었다. 남동생은 4명이나 되었다. 집에 있다가는 굶어 죽을 것 같아 시청에서 수속을 밟아 12월 초 명륜동에 있는 혜명보육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피난까지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각자도생이었다.
등에 2살 동생을 둘러업은 채 한 손으로 8살짜리 동생의 손을 잡고 꽁꽁 언 한강을 건넜다. 6살 동생은 보육원 소사가 끌고 온 달구지 위에 실려 따라왔다. 달구지엔 솥단지와 쌀 봉지 등 식량과 가재도구도 놓였다. 4살 동생만 작은 오빠가 따로 데려갔다. 맹추위에 뼈와 살이 에일 듯했지만, 추위 덕분에 한강이 얼어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가 폭파돼 수백명이 떼죽음을 당한 게 6개월 전이었다.
“옷을 단단히 입었나요?”
“몽땅 껴입었죠.”
“신발은요?”
“보육원 온 뒤에 누군가 신발을 훔쳐가 버렸어요. 피난 가려니 신발이 없어. 근데 보육원 마루 밑을 보니 코고무신 한짝과 실내화가 한짝씩 있더라고. 고무신은 커서 새끼줄로 발과 함께 묶어야 했어요. 그렇게 실내화와 고무신을 짝짝이로 신고 갔죠.”
“길에 사람이 한가득이었나요?”
“어휴. 꽉 찼지. 큰길에 빈틈이 하나도 없었어요.”
“동생들 놓치면 어떡해요?”
“손 놓치면 정말 끝이에요. 사람들 속에서 사라지면 불러도 소용없어. 너무 시끄러워서.”
“어떻게 가려고 하셨어요.”
“노량진을 거쳐 안양, 수원, 평택, 오산, 천안 지나 부산으로 가는 거죠.”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동생들을 거느리고 떠나는 소녀 가장의 피난길은 애잔한 동화의 한 장면 같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다 그는 천애 고아가 되었을까. 내가 궁금해한 여사님의 가족사는 현대사에서 가장 아프고 불편한 정치적 비밀을 품고 있었다.
2주 전의 만남 때 주목했던, 결국 집까지 찾아오게 한 그 발언에 관해서 물었다.
“어머니까지요? 그런 증언은 처음인데요.”
여사님은 77년 만이라고 했다. 이 단순한 이야기를 기자에게 상세히 밝힐 기회를 얻기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 밖에 지은 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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