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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6, 2026

천재작가 차학경의 귀환… 비극적 삶, 잊힌 예술세계 ‘봉인’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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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학신 차가 찍은 테레사 학경 차(1979), 차학경의 사진과 작품들은 ‘테레사 학경 차 기념재단’이 기증하여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미술관과 퍼시픽필름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다. 먼곳프레스 제공
제임스 학신 차가 찍은 테레사 학경 차(1979), 차학경의 사진과 작품들은 ‘테레사 학경 차 기념재단’이 기증하여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미술관과 퍼시픽필름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다. 먼곳프레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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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 테레사 학경 차(이하 차학경)가 귀환하고 있다.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난 차학경은 11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비교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를 넘나들며 실험적인 예술 작품을 선보인 그는 미술가, 작가, 편집자, 영화감독으로 맹활약했다. 1982년 11월, 한창 기량을 펼쳐 보이던 31살의 차학경은 뉴욕에서 백인 남성 경비원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불멸의 고전으로 남게 될 ‘딕테’의 초판본이 나오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유색인종 이민자 여성 예술가의 비극적 끝맺음은 백인 남성 중심 질서 속 인종·젠더 폭력을 상징하는 것처럼도 여겨졌다.

차학신이 찍은 차학경의 손(1979). 먼곳프레스 제공
차학신이 찍은 차학경의 손(1979). 먼곳프레스 제공

유족의 뜻에 따라 그가 남긴 작품들은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BAMPFA)에 안전하게, 다시 말해 봉인하듯 보존되었다. 이런 접근 불가능성은 ‘차학경 신화화’의 결정적인 이유가 됐지만, 작가에 대한 애도와 연구 또한 지연시켰다. 그럼에도 차학경이 남긴 글은 미국에서, 특히 디아스포라, 탈식민주의 여성 연구자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페미니스트 작가 벨 훅스는 차학경을 가리켜 “예술의 선각자이자 동지이며 나의 친족”이라고 했다. 한국계 문화비평가 일레인 킴은 차학경을 서구 학계와 대중에게 알리는 데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 밖에도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 탈식민주의 이론가 겸 영화감독 트린민하, 최근의 한국계 작가 캐시 박 홍,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크리스티나 리베라 가르사 등도 차학경의 영향력과 존재감을 증언해왔다.

차학경의 퍼포먼스 사진 ‘눈먼 목소리’(1975), 먼곳프레스 제공
차학경의 퍼포먼스 사진 ‘눈먼 목소리’(1975), 먼곳프레스 제공
‘잉여 소설’(Surplus Novel, 1980). 먼곳프레스 제공
‘잉여 소설’(Surplus Novel, 1980). 먼곳프레스 제공
‘무제’(모부에게 바치는 시, 연도미상). 먼곳프레스 제공
‘무제’(모부에게 바치는 시, 연도미상). 먼곳프레스 제공

반면 한국에서 차학경과 그의 작품은 신기루 같은 존재로, 발 없는 말로 떠돌았다. 1997년 비로소 ‘딕테’ 한국어판 초판본이 나왔지만 얼마 못 가 절판되었다. 201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며 비로소 한국에도 차학경과 ‘딕테’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절판된 ‘딕테’의 중고책 가격은 40만원까지 치솟았다. 마침내 ‘딕테’ 한국어판(문학사상)이 재발간된 때는 2024년 11월. 이 책은 지금까지 1만1천부 넘게 팔렸다. 이에 힘입어 지난 1월엔 서울대학교 문화예술원 주최로 프로젝트 그룹 ‘구무’의 차학경 관련 전시·퍼포먼스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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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차학경 리부트’, ‘차학경 현상’은 한국만의 일도 아니었다. 2025년 1월부터 석달간 미국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에서 차학경의 대규모 회고전 ‘테레사 학경 차: 다중 봉헌’이 열렸다. 이 국제 순회 전시가 유럽을 거쳐 한국에서도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BAMPFA). 김지승 작가 제공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BAMPFA). 김지승 작가 제공

차학경의 작품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예술 세계로 틈입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책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관객의 꿈’이다. 이 책은 2001년 열린 차학경의 첫 대규모 회고전 도록으로, 2003년 한국에서도 출판사 눈빛에서 번역 출간했다. 차학경의 작품 도판과 여러 대표적인 비평문이 담겼지만 한·미 양국에서 절판된 지 오래였다. 11월5일, 차학경 44주기를 맞아 한국어판 ‘관객의 꿈’이 새롭게 나와 23일부터 서점에 배포된다. 영어 초판본이 출간된 지 사반세기 만에 선보이는 복간본이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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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 편집에 여념이 없는 김진형 먼곳프레스 대표와, 한국어판 공저자 김지승 작가가 지난 10월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교정지 뭉치를 손에 든 김 대표는 “테레사 학경 차의 책을 복간하는 일은 많은 편집자의 오랜 열망이었고 그만큼 커다란 난관이 곳곳에 있었다”고 초탈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2015년부터 판권을 문의하기 시작했지만 항상 거절하는 답변이 왔다. 올해 초 10년 만에 비로소 허락이 떨어졌지만 저작권사에는 영어 초판본 데이터도, 종이책도 없다고 했다. 일이 안 풀릴 때마다 김 대표는 차학경의 사진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좀 도와달라”고. 그 자체가 애도였으며 간구이자 ‘접신’이었다. 마치 응답이라도 하는 듯, 복간 소식을 들은 다른 출판사 편집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해 원서 피디에프(pdf)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10년도 훨씬 전에 편집자들끼리 ‘딕테’를 원서로 읽었는데 너무나 이상한 거예요. 뭔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를 굉장히 사로잡는 마법, 주술 같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편집자들 사이에는 ‘살리고 싶은 책 목록’이 있어요. 문학편집자나 인문편집자나 모두 그의 책을 내고 싶어 했죠. 잊힌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열망이 쌓이고 계승돼 책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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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 대표는 십수년 전부터 이미 계획이 있었다. “‘딕테’는 복원이, ‘관객의 꿈’은 변주가 중요하다”는 메모를 벌써 오래전 적어두었다. ‘딕테’는 차학경이 직접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는 ‘아트북’이기에 철저한 복원이 중요했지만, ‘관객의 꿈’은 타인들이 차학경의 작품을 설명하는 ‘도록’이기 때문에 의미 확장과 25년의 세월을 잇는 새로운 편집이 필수적이었다.

(왼쪽부터) 차학경이 펴낸 영화 이론 선집 ‘장치’(apparatus), 차학경 연구서 ‘자아 쓰기, 민족 쓰기’(Writing Self, Writing Nation), ‘관객의 꿈’ 한국어 초판본. 이승배 기자 photolee@hani.co.kr
(왼쪽부터) 차학경이 펴낸 영화 이론 선집 ‘장치’(apparatus), 차학경 연구서 ‘자아 쓰기, 민족 쓰기’(Writing Self, Writing Nation), ‘관객의 꿈’ 한국어 초판본. 이승배 기자 photolee@hani.co.kr

김 대표는 일단 차학경의 이름을 ‘테레사 학경 차’로 표기하는 원칙을 세웠다. 작가의 혼종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차학경’이란 한국식 호명에 담긴 민족주의적 색채를 덜어내려는 뜻도 담았다. 이 책에는 작가의 예술 작품 도판 200여점과 트린민하의 기념비적인 비평 등이 실렸다. 민하는 차학경의 작품이 서구 남성 중심적 언어 체제와 달리 언어의 균열, 왜곡, 침묵의 틈새를 보여주며 고국과 모국어의 상실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하얀 꽃”을 피운다고 평가한다. 이 중요한 비평을 개정판에도 계승하면서 23년 전 한국어 초판인 ‘눈빛 판본’에 실린 미술사학자 겸 비평가 김홍희의 글이 빠진 자리에는 새로운 한국 연구자들의 글을 싣기로 했다.

김 대표에겐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지난 20여년간 차학경의 작품을 읽고 강독해온 대표적인 차학경 연구자, 김지승 작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 작가는 그동안 쌓아둔 자료와 지식을 기꺼이 내놓고 책의 공동 기획자가 되었다. 김 작가는 개정판에 발문과 함께 차학경의 귀환을 기념하고 그리스 시인 사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성 글쓰기 계보를 안내하는 글을 썼다.

차학경의 묘. 김지승 제공
차학경의 묘. 김지승 제공

“1996년, 영국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로 가는 배 위에서 어느 미국인 남성에게서 테레사 학경 차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 뒤 꾸준히 ‘딕테’를 읽어오고 있어요. 처음에는 삼삼오오 모여 읽다가 이제는 30~40명이 모여 읽어요. 20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몇백명과 함께한 셈입니다. 왜 이 텍스트에 이리도 많은 사람이 흔들리고 전율하는지 대부분 궁금해하고 설명하기 어려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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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 중에도 머리맡에 ‘딕테’를 두고 읽었다는 김 작가는, 사람들이 차학경의 텍스트에 깊이 감응하는 까닭을 “몸으로 하는 경험, 체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머리로 해독해서는 접근하기 어려워요. 내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내 감각을 쓰지 않으면, 내 몸의 맥락을 가져오지 않으면 만나기 힘든 텍스트입니다. 읽는 데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김 작가는 또 다른 두 사람을 공저자로 추천했다. 모두 차학경처럼 ‘지금 여기’에서 ‘타자’와 접속하는 젊은 연구자다. 연극 ‘가자 모놀로그’를 무대에 올렸고,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이야기로 다큐멘터리를 찍은 창작자 겸 연구자 이혜목은 자주 ‘딕테’의 원서 초판 표지에 얽힌 에피소드를 떠올린다고 했다. 원래 ‘딕테’의 초판 표지는 자주색이었는데, 이 색깔은 당시 뉴욕에서 벌어지던 티베트 독립운동의 상징색이었기 때문이다. 자주색을 선택한 건 다름 아닌 차학경이었다. 또 다른 공저자인 반주리 연구자는 원고를 쓰면서 페미니스트 기자인 유숙열이 시인 오드리 로드의 연구실에서 ‘딕테’를 건네받았던 ‘역사’를 소환했다. ‘차학경의 후예’가 된 젊은 연구자들이 곳곳에 흩어진 “기억 조각”을 발굴하고 이어 붙인 셈이다. 김지승 작가는 “익명의 아시아계 이민자 여성으로 여기며 배제하든, 박제화된 역사적 대상으로 소비하든 주류 백인 미학적 시선에서 벗어나 ‘지금 한국 여성’이 쓰는 새로운 글이 필요하다 여겼다”고 말했다.

‘관객의 꿈’ 교정지를 들고 선 먼곳프레스 김진형 대표(왼쪽)와 ‘딕테’ 영문판을 들고 선 김지승 작가. 이승배 기자 photolee@hani.co.kr
‘관객의 꿈’ 교정지를 들고 선 먼곳프레스 김진형 대표(왼쪽)와 ‘딕테’ 영문판을 들고 선 김지승 작가. 이승배 기자 photolee@hani.co.kr

“테레사 학경 차는 영어라는 언어 권력에 대항하는 노래를 썼는데 정작 한국어 독자들은 한동안 번역본을 보지도 못했어요. 최근 독자들은 자부심을 갖고 테레사 학경 차의 텍스트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젊은 여성 독자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의 상황과도 연결됩니다. (차학경이 살해된) 1982년에는 없던 말인데, 이제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죠. ‘페미사이드’요. 젊은 한국 여성들이 많이 죽잖아요.”

‘연보’(Chronology, 1977). 먼곳프레스 제공
‘연보’(Chronology, 1977). 먼곳프레스 제공

한편 김 작가는 “그의 죽음에 과도하게 동일시해서 작품을 보는 관점이 한정되는 것은 우려되지만 그의 작품은 동일시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테레사 학경 차의 작품은 독자와 관객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듯하다가도 일순 밀어내버려요. 마치 ‘접신’했다가 확 분리되는 것처럼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조금씩 공개되고 있는 아카이브의 영상을 보면, 차학경은 장난기 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 작가는 “그저 ‘비운의 천재’로서만이 아니라 다채롭고 입체적인 인간으로 기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트린민하의 말처럼 차학경은 “영매, 연금술사, 마술사, 점술가”로서 타자의 자리를 여전히 응시한다. 어머니의 언어, 침묵과 말, 죽음과 삶을 오가는 곳에서, “모든 세대의 아시아 여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차학경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있다. 전례 없는 규모로 인간의 언어를 복제하고 생각과 대화까지 대신하는 인공지능 시대, 사라진 텍스트를 집요하게 복원하는 출판사와 폐쇄적 아카이브의 문을 끈질기게 두드려 연필로 자료를 직접 베껴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연구자가 아직은 남아 있다.

김지승 작가(왼쪽)와 김진형 먼곳프레스 대표가 지난 10월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승배 기자 photolee@hani.co.kr
김지승 작가(왼쪽)와 김진형 먼곳프레스 대표가 지난 10월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승배 기자 photolee@hani.co.kr

“개정판 가격을 2만9천원으로 책정했어요. 23년 전 책 가격이 2만원이었죠. 어차피 20~30대 독자들이 많을 텐데, 그들에게 3만원대 가격은 비쌀 거 같아 몇쪽이 될지도 아직 모르지만 가격부터 정했습니다. 너무 앞서간 독보적 예술인으로서 테레사 학경 차를 뒤늦게 발견하고 환호하는 데 대해서 빚진 마음이 있어서요.”(김진형)

“‘관객의 꿈’은 ‘딕테’ 옆에 반드시 꽂혀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1970년대, 그 반짝이는 시대를 살다 간 여성의 예술적 삶을 생각해봅니다. 이 책이 테레사 학경 차의 운명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아요. 원본은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안은 번역본이 우리 곁에 있을 거니까요.”(김지승)

관객의 꿈 l 콘스턴스 M. 르월런·로렌스 R. 린더·트린 T. 민하·김지승·반주리·이혜목 지음, 김현주 옮김, 먼곳프레스, 2만9000원
관객의 꿈 l 콘스턴스 M. 르월런·로렌스 R. 린더·트린 T. 민하·김지승·반주리·이혜목 지음, 김현주 옮김, 먼곳프레스, 2만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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