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녀’ 니키를 만든 건 과연 누구였을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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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H열 15번
7년 동안 니키(인디 내버레티)를 짝사랑해 온 베어(마이클 존스턴)는 오매불망 니키에게 고백할 타이밍만 노리고 있다. 고백 연습을 해도 한없이 질척거리는 말만 구구절절 흘러나올 뿐, 니키가 좋아할 법한 ‘쿨’한 수사는 떠오르지 않는다. 지독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짝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
어느 날, 베어는 우연히 들른 골동품 가게에서 소원을 이뤄주는 나뭇가지라는 ‘원 위시 윌로’를 구매한다. 그리고 내뱉은 한마디는? 그렇다, 짝사랑을 경험해 본 당신이라면 역시나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내용. “니키가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소원과 함께 니키의 광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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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감독 커리 바커가 “소원을 빌 때면 조심하라”는 공포영화의 오래된 격언을 바탕으로 11억원의 제작비로 만든 ‘옵세션’은 2026년 최고의 화제작에 이름을 올렸다. 제작비 3400억원 정도로 추정되는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와 그 화제성 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다. 이 두 영화를 한자리에 놓고 말하는 건 (많은 기사들이 제작비와 흥행에서 두 작품을 비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자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태도, 또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그리는 방식이 꽤 다르기 때문이다.
‘오디세이’는 고전을 2020년대의 윤리로 재해석한다. 신들이 정한 질서를 인간의 꾀로 돌파했던 오디세우스(맷 데이먼)가 자신이 초래한 파국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고대 그리스 영웅의 풍모라기보다는 ‘내가 세계를 망쳤다’는 21세기 미국 리버럴 엘리트 남성의 죄의식에 가깝다. 놀런이 ‘오펜하이머’에서 탐구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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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더해 여성 캐릭터도 달라졌다. 특히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의 ‘정절’은 근대의 낭만적 사랑과 여성 리더로서의 판단이 맞물려서 행해지는 정치적 행위다. 그런데 ‘옵세션’을 보고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디세우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페넬로페는 사랑받을 자격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개념녀’다. 아름답고, 능력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가 모험을 하는 동안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확하게 아는 여자인 것이다. 덕분에 관객은 그녀의 ‘지략가’로서의 면모보다는 둘 사이의 ‘찐사랑’에 더 몰두하게 된다.
한편 ‘옵세션’은 ‘개념녀’의 반대편에 있는 여자를 그린다. 좋은 사람이었던 니키는 ‘소원 저주’에 빠진 뒤 베어에게 엄청나게 집착한다. 밤에 일어나 베어의 자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 정도는 애교다. 베어가 출근하지 못하도록 현관문을 테이프로 막아 버린다거나, 베어 주변의 모두를 질투한다. 베어가 다른 친구와 놀러 나가겠다고 말하는 순간 (이 말 한마디를 하는 건 또 얼마나 힘들었는지) 니키는 비명을 지르며 길길이 날뛴다.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자신의 삶은 사라지고, 오로지 베어만을 원하는 여자. 연애 지옥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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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와 니키는 온라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좋은 여자’와 ‘골치 아픈 여자’의 다른 버전이다. 한쪽은 남자를 기다리면서도 자기 삶을 잘 꾸리는 여자이고, 다른 한쪽은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걸고 집착하는 여자다. ‘고수들이 전하는 연애 꿀팁’을 표방하는 수많은 이성애 콘텐츠는 여자들에게 “독립적인 여자가 되라”고 충고한다. “자기만의 취미를 가지세요”, “카톡 기다리는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세요”, “친구를 만드세요” 등등등.
하지만 동시에 여자는 너무 독립적이어서도 안 된다. 병뚜껑 정도는 남자에게 열어달라고 하면서 그의 자존감을 올려주고, 남자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 그의 옆에서 ‘엄마’ 같은 안락함을 제공해야 한다. 그녀는 “남자가 필요하지만, 너 없이도 괜찮다”는 복합적인 시그널을 보내는 연애의 묘를 부려야 하는 셈이다. (물론 이런 콘텐츠가 판매하는 성별 고정관념은 여성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이성애자 남성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좋은 남자’의 규범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온갖 이성애 연애 콘텐츠들이 더해진다. “오빠, 나 살쪘지?”, “오빠, 저 여자 예뻐?”, “오빠, 나 사랑해?” 같은 ‘답정너’ 질문에 정답을 내놓지 못해서 닥쳐오는 각종 환난에서부터, 친구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가 토라진 여친을 달래지 못해 쩔쩔매는 영문 모르는 ‘남친 짤’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빠진 여자의 ‘히스테리’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쇼트폼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니키의 집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영화를 보는 내내 속이 쓰릴 지경이었지만, 무섭다기보다는 낄낄거리며 본 이유는 이런 콘텐츠들이 자꾸만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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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니키의 집착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베어가 니키를 힘들어하는 것처첨 보이지만, 짧은 순간 베어 본인도 이 ‘사랑의 감옥’을 깰 마음이 없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니키가 어떤 기행을 저지르더라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순간까지는 그녀를 곁에 묶어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설사 그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 하더라도. 니키가 베어를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니키를 가스라이팅하고 그들의 폐쇄적이고 안온한 집 안에 가두는 것은 어쩌면 베어다.
어쨌거나, ‘옵세션’은 엔터테인먼트로서 손색이 없는 호러다. 오늘 밤, 데이트 코스로 극장 나들이를 권해드린다. 성별 무관, 쓸 만한 교훈을 얻으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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