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국가에 집중된 기후재난… 복구∞빚 파멸의 늪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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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들어가는 관개시설 하나가 50만자메이카달러(약 420만원)인데, 대부분 망가졌어요. 이전 투자금에 더해 재건을 위한 돈까지 모두 빚이 됐습니다. 갚아야 할 돈이 까마득해요.”
자메이카 남서부 세인트엘리자베스 지역의 농부 데니스 로버츠는 최근 출연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메이카 정부가 허리케인 ‘멀리사’ 피해 1년을 맞아 제작한 영상이다. 수확을 코앞에 둔 호박 등을 키웠던 그는 7만6천㎡ 규모의 농지와 고추 모종 3만그루, 옥수수 3만그루 등을 지난해 10월 말 한꺼번에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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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전체의 사정도 로버츠와 다르지 않다. 인구 280만명의 중미 섬나라 자메이카는 나랏빚을 성공적으로 줄인 드문 사례로 꼽혀왔다. 자메이카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144%(2013년) 수준이었는데, 10년 뒤 그 절반인 72%로, 2024년에는 64%로 대폭 줄었다. 정부 지출을 삭감하는 등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였다. 지난해 9월엔 국가신용등급이 처음 상향 조정되고 실업률·범죄율도 주는 등 살림살이가 피어날 참이었다.
하지만 불과 한달 뒤, 자메이카 역사상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이 몇년에 걸쳐 이룬 것들을 단 몇시간 만에 파괴했다. 추산 피해 규모는 122억달러(약 16조6천억원). 2024년 국내총생산의 56.7%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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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시각)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제3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1·기후총회)가 개막한다. 이번 기후총회에서는 자메이카처럼 어렵게 쌓아 올린 경제적 성과를 기후재난이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피해국을 빚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현실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실제 천문학적 복구 비용을 조달하려 자메이카는 다시 빚을 내야 했다. 세계은행이 발행하는 재난채권, 비영리기구인 카리브해재해위험보험기구(CCRIF)의 모수형(특정 기준을 넘기면 보험금을 지급) 재해보험 등에 기댔다. 그러나 이를 모두 끌어모아도 손실액의 2% 수준(2억4200만달러)에 불과했다. 결국 세계은행 등에서 다시 빚을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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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이후 새로 지게 된 부채는 원금(36억달러)과 이자 등을 합해 49억~57억달러에 이른다. 미국 노스이스턴대 연구진은 최근 연구에서 허리케인이 없었다면 60% 수준이었을 자메이카 부채 비율이 도로 68.5%까지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늘어난 부채는 투자 유치를 저해해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주고, 정부 지출에서 해마다 빠져나갈 상환금은 도로·교량·전력망 등 공공투자 규모를 줄이게 만든다. 늘어난 부채(8.5%포인트 상승) 가운데 6.4%포인트는 차입 그 자체, 2.1%포인트는 경제성장 후퇴의 영향으로 분석됐다.
기후변화로 벌어지는 대규모 재난은 소득 수준이 낮은 나라에 집중된다. 피해국들은 복구 과정에서 ‘기후-부채 파멸의 고리’에 빠진다. 천문학적 복구 비용을 대려고 빚을 내고, 그 빚을 갚느라 더 큰 비용을 부담하고, 그 결과 꼭 필요한 투자를 하지 못해 재난에 더욱 취약해지는 악순환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자메이카에 대해 “극한 기후에 노출돼 있고 관광·농업 의존도가 높아 경제 기반이 취약하다. 낮은 생산성, 취약한 사업 환경, 높은 비정규직 비율과 범죄율 등 오랜 기간 지속된 제약 요인들도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인위적 온실가스 배출 때문에 오른 지구 기온은 멀리사의 발생 가능성을 6배가량 높인 것으로 분석된다. 자메이카가 대기로 배출한 온실가스는 전 지구 배출량 가운데 0.026%에 불과하다. 일방적인 피해국인 셈이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책임이 있는 선진국들로부터 ‘보상’이나 ‘배상’을 받을, 제도화된 방법은 아직 없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은 그동안 ‘완화’(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와 ‘적응’(기후변화 영향 대비)을 주로 논의해왔고, 기후변화로 인한 극단 기상 현상 때문에 발생하는 ‘손실과 피해’ 논의는 비교적 최근에야 진전이 있었다. 선진국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자금으로 기후재난 피해를 지원(배상이 아닌)하는 ‘손실과 피해 대응 기금’(FRLD·손실피해기금)이 2023년 아랍에미리트 기후총회(COP28)에서 공식 출범했고, 기금이 합의한 집행 방식(‘바베이도스 이행 방식’)에 따라 올해 말 첫 지원 대상을 확정할 계획이다. 차관이 아닌, 무상원조다.

간신히 첫발을 뗐지만, 갈 길은 멀다. 기후변화로 인한 손실과 피해를 얼마나 어떻게 인정할지, 자금 조성은 누가 얼마나 어떻게 책임질지 등 근본적 쟁점들이 합의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기금 규모는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기후변화 취약국들이 보는 손실과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연간 7244억달러(약 1천조원)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있지만, 현재 선진국이 기금에 붓겠다고 약정한 돈은 8억달러 수준이고, 실제 낸 건 5억달러에 그친다. 첫 집행을 위해 3억4200만달러가 배정됐는데 신청 금액의 총액은 그 여덟배에 이르는 28억달러다. 기금 이사회는 12월 자메이카, 아이티,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4개국이 신청한 7740만달러의 자금 지원을 결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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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지난 8월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네팔 산악지역 대홍수 사태는 국제사회에 손실과 피해 대응의 시급성을 다시금 일깨웠다. 네팔 정부는 손실피해기금에 긴급 지원을 신청했고, 기금 쪽은 특별이사회를 여는 등 이례적 절차를 밟으며 네팔에 2천만달러의 지원 자금을 잠정 배정했다. 그럼에도 이 과정이 두달 가까이 걸렸고, 2천만달러는 네팔에 필요한 전체 복구 비용 47억달러의 0.5%에도 못 미친다.
네팔 참사와 맞물려 이번 기후총회에서는 손실과 피해와 관련한 전반적인 논의가 불거질 전망이다. 국제 시민사회 네트워크인 ‘손실과 피해 협력체’(L&DC)는 이번 기후총회에 대한 요구를 담아 낸 최근 보고서에서 “손실과 피해를 완화·적응과 동등한 기후행동으로 다루고, ‘전 지구적 이행점검’(GST)에도 포함해야 필요한 규모의 재정 지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선진국들은 부유세 강화, 화석연료 보조금 폐지, 오염자 부담 원칙 적용 등을 통해 연간 6조6천억달러 규모의 공공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행동할 수단과 의무를 모두 갖고 있으므로, 남은 것은 약속을 실질적 지원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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