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이야기들로 다시 쓰는 ‘AI 시대의 사회계약’

한겨레가 주최하는 제17회 아시아미래포럼이 28일 오전 8시15분부터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주제는 ‘격변의 시대, 리딩국가로 가는 길’. 국제 질서 변동과 인공지능(AI) 전환이 겹치는 격변 속에서 공동체 공존을 위한 한국의 길을 모색한다. 포럼에 앞서 주요 연사 인터뷰와 기고를 잇달아 싣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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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지난 10월 초, 독일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신입생들이 함께한 한국문화주간, 금빛 머리의 독일인 학생이 설레는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구년을 보내는 독일에서 한국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유럽의 도시마다 방탄소년단(BTS)이 나오는 광고판이 걸려 있는가 하면 골목 상점에도 한국 화장품이 놓여 있고, 어느 매장에서도 케이(K)팝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아들 학교의 수학 선생님은 한국 아이들이 푸는 문제집을 혹시 구할 수 없느냐고 슬며시 묻기도 했다. 한국의 위상은 어느새 현기증이 날 만큼 달라져 있다.
몇 개의 성적표를 펼쳐 보면 그 모습은 더 화려하다. ‘글로벌 인공지능(AI) 지수’에서 한국은 여섯 번째로 독일과 일본을 앞섰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AI 인덱스 2026’에서도 한국은 인구당 인공지능 특허가 세계에서 가장 많았고, 주목할 만한 AI 모델을 내놓은 나라로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 번째였다. 한국은행의 올해 성장률 전망도 5년 만에 가장 높은 3.3%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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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쩐지 나는 살얼음 위에 차려진 화려한 잔칫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불안하다. 이토록 부러움을 사는 나라에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스스로 매기는 삶의 만족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33위에 머물고, 자살률은 스무 해 넘게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력해도 처지가 나아지기 어렵다고 여기는 청년도 절반을 넘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나라, 서로 따뜻하게 기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도 성공하고 있을까. 성공담이 쏟아지는 동안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끝내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우리가 놓쳐서 못 보는 것일까,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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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도저히 자랑할 수 없는 숫자들을 따라가 보자. 세계불평등연구소에 따르면 최상위 1%가 가져가는 소득의 몫은 외환위기를 지나며 세 배 가까이 늘어 2022년 14.7%에 이르렀다. 지난해 말 가계금융복지조사에서는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 사이 격차가 3년 만에 다시 벌어졌고, 자산은 더 기울어 순자산 상위 10% 가구가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가진 반면, 하위 절반의 몫은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불편한 이야기의 길로 한 발 더. 전체 고용률이 같은 달 기준 역대 가장 높았던 올해 8월에도 청년 고용률은 두 해 넘게 뒷걸음질 쳤고, 줄어든 청년 일자리 대부분은 인공지능의 영향을 크게 받는 업종에서 나왔다. 신입에게도 경력을 묻는 시장에서 첫 자리조차 얻기 어려워지자, 많은 청년이 플랫폼노동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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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우리 연구팀이 청년 플랫폼노동자 3천여 명을 조사해 보니, 절반 이상에게 플랫폼 일이 생애 첫 일이었다. 제도의 보호 밖에서 기댈 곳도 많지 않았다. 플랫폼 일만 하는 청년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31.7%에 그쳤고, 우울할 때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는 청년도 세 명 중 한 명꼴이었다. 손안의 앱으로 일감은 쉽게 찾지만 정작 무너지는 순간에는 붙잡을 손이 없다. 청년들의 어깨에 내려앉은 쓸쓸한 무게가 고립으로 이어진다. 앞날을 바라보는 마음도 무겁다. 열 명 중 일곱 가까이는 5년 내 AI가 자기 일을 대신할 것이라고 답했고, 대학을 나왔다고 덜 불안한 것도 아니었다. 노력해도 처지가 나아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응답은 70.3%로, 플랫폼 청년들에게 비관의 무게는 더 무거웠다.
이제 더, 더 보이지 않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쫓아가 볼까. 눈부신 성과는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있다지만, 그 성과를 떠받치는 수많은 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난 9월 법원 앞에는 자율주행차가 사물을 알아보도록 영상에 일일이 표시를 해 온 데이터 라벨러 106명이 밀린 보수를 달라며 모였다. 회사가 기준과 단가를 정하고 검수까지 했지만, 이들을 근로자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AI의 두뇌라는 반도체 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도 삼성전자에만 5만~6만 명에 이른다는 추산이다. AI 강국의 성공이란 수많은 사람의 손과 눈과 땀이 쌓아 올린 것이고, AI 공급망의 아래는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로 겹겹이 채워져 왔다.
그렇다면 저마다 자유로우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까. 이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오래 붙들어 온 고민이다. 우리는 그 답을 사회계약, 곧 함께 만드는 약속에서 찾아왔다. 함께 위험을 나누는 사회보장제도를 세우고,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하도급법처럼 힘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약속들을 하나씩 쌓아 왔다. 너도나도 입에 올리는 ‘AI 전환기’, 우리는 어떤 약속을 새로 맺어야 할까. 화려한 성공의 빛 뒤에서 길을 잃고 가라앉는 이들의 이야기는 영영 묻혀 있어도 되는 것일까.
우리가 쌓아 온 제도의 약속은 대부분 고용‘관계’를 전제로 시작됐다. 나를 고용한 회사와 나 사이의 관계다. 하지만 그 관계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사회보장의 기준을 고용계약에서 일과 소득으로 옮겨야 할 때다. 소득이 있으면 보험료를 내고, 일감을 중개한 플랫폼도 제 몫을 함께 내는 소득 기반 사회보험이라면 보호받는 사람의 범위는 훨씬 넓어질 수 있다. 보수의 바닥도 다시 놓아야 한다. 다음 일감을 기다린 시간과 기름값, 통신비까지 셈해, 어떤 계약을 맺었든 그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 최저보수를 정하는 것이다. 플랫폼노동자에게도 닿는 몇 안 되는 소득 지원인 근로장려금을 정부가 넓히겠다니 반가운 일이다. 다만 플랫폼이 낮게 매긴 보수를 세금으로 메워 주는 데 그친다면, 그 책임을 기업 대신 국가가 떠안게 된다. 최근 채택된 국제노동기구의 플랫폼노동 협약도 비준해야 하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훌쩍 자란 몸에 맞게 옷을 고쳐 입듯, 70년이 넘은 근로기준법도 여러 형태로 일하는 모든 사람을 품도록 고쳐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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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금 더 과감하게 상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AI의 똑똑함이 수많은 사람의 노동에서, 그리고 국민의 세금으로 깔린 공공 인프라에서 왔다면, 그 결실을 몇몇 기업의 몫으로만 남겨 둘 수는 없다. 함께 만든 것은 함께 나누어야 할 공동의 것, 곧 ‘커먼즈’라는 생각을 다시 광장으로 꺼내 놓자. 그렇게 사회로 돌아온 몫은 모두에게 조건 없이 돌아가는 기본소득이 될 수도, 출발선의 격차를 덜어 주는 청년기초자산이 될 수도 있다. 생태 활동처럼 시장이 값을 매기지 않던 일에 소득을 잇는 참여소득, 누구나 누려야 할 주거와 의료 같은 기본서비스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어떤 약속을 함께 만들어 갈지 토론을 시작하자. 재생에너지와 건물 에너지 효율 개선처럼 기후위기에 맞서는 일, 그리고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돌봄에서도 좋은 일자리를 찾고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올해 3월 전국에서 시작된 통합돌봄의 내년 예산은 1558억원으로, 프런티어 인공지능에 새로 배정된 4조7천억원의 30분의 1 수준이다. 구조의 문제가 다시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읽히는 동안, 드러나지 않는 불평등은 은밀하게 그러나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재원은 멀리 있지 않다. 세계불평등보고서는 최상위 자산가에게 해마다 최소한의 세금을 매기자고 제안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올해 국세는 예상보다 60조원 넘게 더 걷힐 전망이고, 정부는 장기 추세를 웃도는 세수로 미래대응기금을 만들겠다고 한다. 문제는 그 돈이 누구에게 먼저 닿느냐다. 기금의 주인공은 거대한 AI 모델이 아니라, 이를 떠받쳐 온 보이지 않는 손들과 돌봄을 기다리는 이웃이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계약의 첫 줄은 가려진 이야기들을 불러내, 그 이야기 속 사람들과 함께 쓰는 것이어야 한다. 망설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지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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