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77세 하루키의 첫 여성 주인공···3년 만의 신작 ‘가호’에 독자들 열광
2024년 도쿄 스미다 트리포니홀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무라카미 하루키. AFP연합뉴스
가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376쪽 | 1만8500원
그림책 작가 가호는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남자 사하라에게서 “그쪽처럼 못생긴 상대는 처음”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본다. 딱히 아름답지도 않지만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여자다. 남녀공학인 공립학교에 다니면서도, 미술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어렵지 않게 남자를 만났다. 남자의 말에 상처받았다기보단 호기심이 생겨 그를 한 번 더 만난다. 태연해 보이는 그는 자신이 모터사이클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첫 만남에서 일부러 기분 나쁜 말을 건넸다고 말한다. 사과는 없었다. 두 번의 불쾌한 만남 뒤 가호는 훔쳐 간 자신의 얼굴을 찾으러 모험에 나선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을 낸다. 가호는 이상한 만남은 잊고 “지금껏 그래왔듯 있는 그대로 세상을 살아”가기로 한다.
이 짧고 강렬한 만남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려낼 소설의 기묘한 시작을 알린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이후 3년 만의 신작이자, 작가가 처음으로 여성을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으로 화제를 모은 <가호> 얘기다.
소설의 본격적인 전개는 가호 앞에 나타난 검은 털의 개미핥기 부부가 “당신은 무사시사카이로 이사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던지면서 시작된다. 개미핥기 부부는 자신들이 브라질 정글의 재규어를 피해 일본으로 왔다고 말하며 가호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들은 가호를 지켜주겠다며,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칼 가는 집’ 주인, 가호의 어머니를 노리며 정글에서 도망쳐 나온 흰개미 여왕 등이 등장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가호의 주변을 맴도는 사하라의 모터사이클 소리는 불길한 암시를 더해가며 환상과 같은 이 세계의 긴장감을 높인다.
현실의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 내면의 깊숙한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작가가 시도하는 비현실적인 상황 전개는 이번 작품에서도 두드러진다. 환상의 외피를 쓴 이야기는 추리 소설 같은 모습으로 질주하며 독자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런 면에서 현지 출간 이후 나온 ‘그의 소설 가운데 가장 쉽고 재미있으며 스릴 넘친다’는 평가는 적절해 보인다.
이야기의 내피를 찾아가다 보면 두 가지가 두드러져 보인다. 특별히 불화라고 할 것은 없지만, 어쩐지 화해가 필요해 보이는 가호와 가호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여성 그리고 모성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은 그가 <해변의 카프카> 등 작품에서 보여온 오이디푸스적 운명과 성장 이야기의 성별 반전처럼 보인다. 다만 여성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일부 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가호가 여성이라는 점과 함께 소설에서 중요한 지점은 그의 직업이 이야기를 만드는 그림책 작가라는 점이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혹은 세계를 이야기로 해석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할 때 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건 당신 자신의 세계 속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당신이 필연적으로 그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선도 악도 아닌 것도 다 같이 당신 품으로 밀려듭니다. 보세요, 이렇게 개미핥기도 오지요, 재규어도 나타나지요, 흰개미 여왕도 찾아옵니다. 당신이 그것들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밀려드는 그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단호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인공인 당신의 책무입니다-받아들일지 내칠지 판별해서 좋은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것, 그게 당신 역할입니다.”
그림책 속 주인공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져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것처럼, 그것이 이야기 속 주인공의 ‘책무’인 것처럼, 가호 역시 자신을 둘러싼 불가해한 사건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소설 안에서 가호가 그리는 그림책들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설 후반 그가 써 내려가는 그림책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혼자 숲에 남은 소녀 ‘미소라’의 이야기다. 가호는 현실과 미소라의 가상 세계는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현실이 그림책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고, 그림책의 사건이 현실의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현지 출간 인터뷰에서 이번 작품을 긴 투병을 마친 후 도전하는 마음으로 완성해 낸 “성장과 회복의 이야기”라고 답했다. 하루키는 2024년 심각한 질병으로 한 달간 입원 치료를 하며 이 과정에서 체중이 17㎏이나 줄었다고 한다. 그는 투병 이후 글을 쓰고 싶다는 긍정적 감정이 작품에 반영됐다고도 했다. 작품 속 가호가 결말을 통해 맞이하는 성장이 하루키가 투병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읽는다면 더 흥미롭겠다.
지난 7월 일본 도쿄의 한 서점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가호>가 전시돼 있다. 책은 출간 나흘 만에 30만부가 팔렸다. AP연합뉴스
<가호>는 지난 7월 일본에서 출간돼 나흘 만에 발행부수 30만부를 기록했다. 출간 첫날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에 ‘오픈런’을 하는 행렬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내 반응도 뜨거웠다. 한국판 출간 예고를 알린 출판사 티저 사이트에는 4일간 7만명이 방문했다. 온라인 서점 예약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출판사는 북클럽 회원들과 함께 <가호>를 미리 읽는 ‘하루키 리딩 파티’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책의 문장을 낭독하고 작품과 어울리는 클래식과 재즈 등 음악을 함께 듣는 ‘무라카미 하루키 청음회’는 예매 시작일에 전 회차 매진됐다.
1949년생으로 올해 일흔일곱을 맞은 노년의 작가임에도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히고, 출간 소식이 있을 때마다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력이 여전히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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