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우리 ‘야차’ 할까?”···텀블러 들고 문 밖으로 나선 20·30세대, 이렇게 차를 즐긴다
최근에는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집에서 마시던 차를 공원과 강변, 바다로 가져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피크닉에 차를 곁들이는 ‘티크닉(Tea+Picnic)’부터 여러 종류의 다구를 챙겨 여럿이 즐기는 ‘야외 다회’까지 방식도 다양하다. 차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야외에서 차를 마시는 일을 줄여서 ‘야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nam2da_xo 제공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변. 돗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보온병을 열었다. 뜨거운 물이 작은 다관으로 흘러들어가고, 찻잎이 물속에서 천천히 몸을 편다. 찻잔에는 연한 빛깔의 차가 채워진다. 한잔씩 돌려 마시는 동안 누군가는 책장을 넘기고, 누군가는 강 건너 풍경을 바라본다. 음악도, 술도 없다. 그저 찻물이 식어가는 속도만큼 느긋한 시간이 흐를 뿐이다.
일상이 된 차, 밖으로 나서다
한때 차는 조용한 다실이나 전통문화 체험관에서 정해진 방식과 예법에 따라 즐기는 음료라는 인식이 강했다. 어떤 차를 고를지부터 물의 온도와 차를 우리는 시간, 다구를 다루는 법까지 알아야 할 것이 많았다. 차를 마시는 일에는 어딘가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따라붙었다.
최근에는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집에서 마시던 차를 공원과 강변, 바다로 가져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피크닉에 차를 곁들이는 ‘티크닉(Tea+Picnic)’부터 여러 종류의 다구를 챙겨 여럿이 즐기는 ‘야외 다회’까지 방식도 다양하다. 차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야외에서 차를 마시는 일을 줄여서 ‘야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격식을 중시하는 다도가 문밖으로 나온 데에는 새롭게 유입된 젊은 차 소비자의 영향이 컸다. 지난 6월 열린 제23회 국제차문화대전에서 진행한 다례 체험 프로그램을 찾는 방문객의 50~60%가 20·30세대였다. 차가 중장년층이 주로 즐기던 전통문화의 영역을 넘어 젊은 세대의 취향과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다.
홍보람씨(가명·@himnaeryeo) 는 “텍스트힙이나 포엣코어처럼 요즘 젊은 세대가 자신의 취향을 문화로 만들어가듯, 차를 마시는 행위도 힙한 문화이자 웰니스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통 현장에서도 이런 변화가 포착된다. 올해 상반기 현대백화점의 20·30세대 차 관련 상품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3% 증가했다. 스타벅스코리아에서도 2025년 전체 차 음료 판매량이 전년보다 8% 늘었고, 특히 20대 고객의 차 음료 구매량은 20% 증가했다. 차 전문점들도 단순히 음료를 파는 데서 벗어나 차를 ‘경험하는 과정’을 상품화하고 있다. 소규모 클래스를 열어 여러 종류의 차를 비교해 마시게 하거나, 차와 디저트를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식이다.
스스로를 ‘낮차, 밤차, 야차 할 것 없이 자주 즐겨 마시는 10년 차 차 애호가’라고 소개한 홍보람씨(가명)는 엑스(X)의 차 관련 계정에서 우연히 야외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접한 뒤 야외 독서에 차를 곁들이는 자신만의 취미를 만들었다. 그는 “텍스트힙이나 포엣코어처럼 요즘 젊은 세대가 자신의 취향을 문화로 만들어가듯, 차를 마시는 행위도 힙한 문화이자 웰니스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차 애호가 정예지씨(@hae.time_) 는 “차를 마시는 일이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된 분위기”라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실내에서만 차를 마시기 아쉬워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할 때마다 나서게 되는 것 같다. 야외에서 만나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야차의 신선한 재미”라고 했다.
비싼 다구 대신 텀블러…격식도 가벼워졌다
달라진 것은 차를 마시는 장소만이 아니다. 차를 대하는 태도와 즐기는 방식도 한층 가벼워졌다. 차 애호가 정예지씨는 “차를 마시는 일이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된 분위기”라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실내에서만 차를 마시기 아쉬워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할 때마다 나서게 되는 것 같다. 야외에서 만나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야차의 신선한 재미”라고 했다.
또한 정씨는 “차에 대한 문턱이 낮아지면서 예쁜 찻그릇, 맛있는 다식, 마음에 드는 찻집 등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담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확장됐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찻자리를 공유하기도 한다”며 “이런 자유로움과 다양성이 어려울 것만 같았던 차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게 한다”고 덧붙였다.
SNS는 이렇게 달라진 찻자리를 퍼뜨리는 매개가 됐다. 차를 마시는 장면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가 되면서 자신의 찻자리를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해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누군가의 찻자리를 보고 차에 관심을 갖고, 직접 경험한 뒤 다시 자신의 찻자리를 보여주는 식이다. 차를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차를 ‘연출하고 공유하는’ 문화가 생겨난 셈이다.
젊은 세대는 왜 야외로 차를 들고 나갈까. 차가 만들어내는 느린 속도와 그 속에서 보내는 시간 때문이다. 빠르게 마시고 자리를 뜨는 음료와 달리, 차를 고르고 찻잎이 우러나기를 기다리고 잔을 건네는 과정까지 모두 마시는 경험이 된다. @leecalm_ 제공
전통 찻집을 운영하는 정기우 대표도 일주일에 한 번씩 ‘번개 야차’를 연다. 소셜미디어와 지역 커뮤니티에 시간과 장소를 공지하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신다. 정 대표는 “불과 3~4년 전만 해도 차를 즐기는 젊은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며 “처음에는 잠깐 이러고 말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는데, 요즘엔 오히려 이렇게 차를 즐길 수도 있구나 하고 서로 배우는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차의 외출’은 격식과 도구에 대한 부담까지 덜어냈다. 야외에서는 비싼 다구를 갖추기보다 손에 익은 실용적인 도구를 찾게 된다. 홍씨 역시 퇴수기나 숙우(물을 식히는 도구) 등 전통 다구를 모두 챙기기보다 저렴한 생활용품이나 플라스틱 소재의 대체 용품을 활용한다고 했다. 갖춰야 할 것이 많을수록 차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도구를 가볍게 덜어내면 오히려 차를 마시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홍씨는 “비싸고 격식을 갖춘 다구 대신 저렴한 생활용품을 활용하면서 차를 마시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야차의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왜 지금, 야차인가
그렇다면 젊은 세대는 왜 야외로 차를 들고 나갈까. 차가 만들어내는 느린 속도와 그 속에서 보내는 시간 때문이다.
차는 물을 끓이고 온도를 맞춘 뒤 찻잎이 우러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한 잔을 마시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빠르게 마시고 자리를 뜨는 음료와 달리, 차를 고르고 찻잎이 우러나기를 기다리고 잔을 건네는 과정까지 모두 마시는 경험이 된다. 여기에 야외에서는 바람과 날씨, 눈앞의 풍경처럼 계획할 수 없는 순간들이 더해진다. 차 한 잔을 마시는 일이 곧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되는 셈이다.
대학생 이나희씨(가명)는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반항적이고 시끄러운 취미를 즐기리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차분함과 조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술자리 문화가 사라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 같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야차는 실수해도 큰일이 벌어지지 않고, 모든 것을 갖추지 않아도 괜찮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있다”고 했다.
5년 차 ‘차 덕후’ 이지영씨(@leecalm_) 역시 야차의 매력을 두고 “집에서 먹어도 되는 김밥을 굳이 도시락으로 싸서 돗자리를 들고 공원에 가서 먹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했다.
5년 차 ‘차 덕후’ 이지영씨 역시 야차의 매력을 두고 “집에서 먹어도 되는 김밥을 굳이 도시락으로 싸서 돗자리를 들고 공원에 가서 먹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힐링하고 여유를 즐기는 낭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이라고 했다.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마련한 시간이기에 오히려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느긋함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차를 매개로 사람들과 만나 취향을 나누는 자리도 늘고 있다. 지역 생활 커뮤니티 당근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다회 모임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4% 증가했고, 가입자 수는 140% 늘었다. 월평균 일정 수도 2.4배에 달했다.
정다진 티소믈리에는 “잘 우린 차의 맛만큼이나 누구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는지가 중요해진 시대”라며 “어쩌면 지금 젊은 세대가 차에서 찾는 것은 ‘차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느리게, 그러나 내 방식대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깊어가는 가을, 이번 주말에는 야외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돗자리 위에 놓인 작은 찻잔이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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