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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31, 2026

한 과학책 번역가가 쌓아온 100권의 세계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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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 번역가(왼쪽 둘째)가 지난 6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미션 임파서블: 번역’이라는 주제로 다른 연사들과 함께 강연을 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를 통과하는 번역가의 작업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2026. 서울국제도서전
노승영 번역가(왼쪽 둘째)가 지난 6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미션 임파서블: 번역’이라는 주제로 다른 연사들과 함께 강연을 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를 통과하는 번역가의 작업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2026. 서울국제도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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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는 대개 주제별로 정리한다. 진화론 책은 진화론 책끼리, 우주 책은 우주 책끼리 꽂아둔다. 저자별로 모으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은 역자 이름만 보고 한칸을 내주고 싶은 책들이 있다. 저자는 제각각이고 주제도 엉뚱하게 흩어져 있는데 한데 모아두면 그 사람의 취향이 보인다. 노승영이 옮긴 책들이 그렇다.

과학책 번역은 어렵다. 외국어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문장을 옮기기 전에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틀리게 옮기면 과학 사실이 틀리고, 정확하게만 옮기면 문장이 죽는다. 저자의 생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우리말로 읽히게 해야 한다. 과학책 한권을 제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그 학문을 다시 배워 우리말로 설명하는 일에 가깝다. 번역가는 책을 가장 오래, 가장 느리게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문장 하나를 지나가기 위해 사전을 뒤지고 논문을 찾고 저자의 다른 책까지 들춰야 한다. 독자는 그 수고를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 잘된 번역일수록 더 그렇다. 우리나라에 좋은 과학책 번역가가 많다는 것은 그래서 큰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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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은 영어영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연구했다. 2007년부터 전업 번역가로 일했고 2023년에 이미 번역서가 100권에 이르렀다. 지금은 적어도 100권을 훌쩍 넘었을 것이다. 자연과학만이 아니다. 철학, 인문학, 경제, 환경, 정치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이정모 제공
이정모 제공

최근에 나온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사고의 유희’(아르테)부터 보자. 1332쪽이다.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인 그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았다. 루빅큐브에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게임이론에서 인공지능으로, 수학에서 음악과 언어로 쉴 새 없이 건너뛴다. 원제 ‘Metamagical Themas’부터 마틴 가드너의 ‘Mathematical Games’를 뒤섞은 말장난이다. 이런 책은 영어만 잘해서는 옮기기 어렵다. 저자가 무엇을 가지고 노는지 알아야 하고 그 장난을 우리말에서도 살려야 한다. 번역가도 저자와 함께 놀 줄 알아야 한다.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동아시아)도 같은 칸에 꽂고 싶다. 사고실험, 비유, 반례 같은 철학의 연장을 들고 의식과 자유의지와 진화를 파고든다. 호프스태터와 데닛을 나란히 읽다 보면 좋은 과학책은 지식을 더해주는 책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버릇을 건드리는 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내가 특히 아끼는 책은 로빈 월 키머러의 ‘향모를 땋으며’(에이도스)다. 식물생태학자인 저자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포타와토미족의 전통을 함께 품고 있다. 과학자는 식물을 관찰하고 이름 붙이고 측정한다. 원주민의 전통에서 식물은 선물을 주고받는 이웃이고 때로는 스승이다. 키머러는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는다. 과학이 자연을 정확히 보는 법을 가르친다면 전통 지식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식물학의 언어와 원주민의 세계관, 시적인 문장이 한 책에 뒤섞여 있으니 번역하기 까다롭다. 그런데 우리말로 읽을 때 그 결이 거슬리지 않는다. 번역가가 눈에 띄지 않아서 오히려 번역가를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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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의 ‘자연은 퀴어하다’(에이도스)도 익숙한 자연관을 흔든다. 균류와 동식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남성과 여성, 정상과 비정상의 칸이 자연에서는 그리 반듯하지 않다. 자연은 우리의 분류표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연을 이해하려면 내가 들고 있는 자부터 의심해야 할 때가 있다.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사월의책)은 산업사회를 향해 같은 의심을 던진다. 임금을 받는 노동 뒤에는 돈을 받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일이 숨어 있다. 식물과 균류를 이야기하다가 노동으로 옮겨왔지만 노승영의 책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점프가 낯설지 않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말레이 제도’(지오북)도 빼놓기 어렵다. 월리스는 1854년부터 8년 동안 말레이 제도를 탐사하며 12만점이 넘는 생물 표본을 모았고 그곳에서 자연선택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설을 발표한 바로 그 월리스다. 19세기 자연사의 현장 기록이자 모험담이다. 노승영은 이 책으로 2017년 한국과학기술도서상 번역상을 받았다.

노승영의 번역 목록을 죽 훑어보면 슬슬 한 사람의 취향이 보인다. 물론 번역가가 모든 책을 제 손으로 고르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의 제안도 있고 생계를 위해 집어 든 책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100권쯤 쌓이면 선택의 버릇이 보인다. 어떤 분야로 자꾸 돌아가는지, 어떤 까다로운 저자를 기꺼이 붙잡는지가 쌓인다. 그러니 100권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가 어떤 문제 앞에서 오래 머물렀는지 보여주는 흔적이기도 하다. 목록을 보다 보면 번역가의 이름이 출판 정보 한 줄이 아니라 일종의 추천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노승영이라는 이름을 기준으로 한칸에 모아놓으면 묘하게 이야기가 생긴다.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당연하다고 믿는 질서와 경계는 정말 당연한가? 그가 옮긴 책들은 분야는 달라도 자꾸 이런 질문으로 돌아온다. 번역가는 저자가 쓴 한권의 세계를 우리말로 옮긴다. 하지만 그렇게 옮긴 책이 100권을 넘으면 책과 책 사이에도 길이 생긴다.

좋은 번역가를 만나는 것은 좋은 저자를 만나는 것만큼 행운이다. 마음에 드는 저자의 다음 책을 기다리듯 역자의 이름을 보고 책을 집어도 된다. 책꽂이를 언제나 주제별로 정리할 필요는 없다. 노승영이 옮긴 책들을 한데 꽂아보자. 100권 넘게 책을 옮긴 사람의 머릿속 서가를 조금 빌려 쓰는 셈이다. 무엇보다 함께 꽂아두면 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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