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권한·책임 나누게 될 것…중견강국 한국 경험, 귀한 자산”
‘선진 민주국가’ 한국의 역할은
미·중 경쟁에 종속됐다 여기지말고
‘아세안+3’ 주도한 경험 등 바탕
여러 분야서 포용적 협력 보여줘야
인도 출신 아미타브 아차리아 아메리칸대 석좌교수는 국제정치·국제관계 분야 세계적 석학이다. 비서구권 학자 최초로 국제정치학계 최대 학술단체인 국제학협회(ISA) 회장(2014~2015년)도 지냈다. 그는 올해 초 국내에 ‘21세기 지정학’(21세기 북스·원저 The Once and Future World Order)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책에서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독점적 지배력이 약해지고, 복합상영관처럼 다양한 주체가 공존하며 책임을 나눠 맡는 ‘멀티플렉스 세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제17회 아시아미래포럼(10월28일)에서 ‘미국 일방주의 이후, 동북아의 선택’을 주제로 기조 연설을 한다. ‘21세기 지정학’을 번역한 최준영 수석(법무법인 율촌)이 저자와 나눈 이메일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원화되는 세계의 의미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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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등 서구 중심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서구 지배력이 약화되면 세계는 무질서에 빠져들까. 국제정치학자 아미타브 아차리아 교수는 저서 ‘21세기 지정학’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외교와 공존, 평화와 인간 존엄성을 지탱해온 원칙은 특정 문명과 강대국의 발명품이 아니어서, 서구 우위가 약해져도 인류가 함께 쌓아온 세계 질서의 기본 원칙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서구 주도 질서의 쇠퇴가 모든 붕괴를 의미하진 않는다”는 그의 시각은 비서구 문명 역사에 대한 재평가에서 출발한다. 그는 서구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비롯한 여러 가치를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다양한 문명의 기여와 상호작용 속에 발전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환기를 맞은 세계는 점차 ‘멀티플렉스 세계’로 재편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는 강대국뿐 아니라 중견국, 중소국, 국제기구, 기업, 시민사회 등 여러 주체가 사안별로 리더십과 책임을 나누는 다원적 질서를 뜻한다. 단일 강대국 중심의 단극 체제, 소수 강대국들이 질서를 나눠 갖는 다극 체제보다 넓은 개념이다. 아차리아 교수는 이번 이메일 인터뷰에서 “패권국의 교체를 넘어, 세계 질서를 결정할 권한 자체를 더 넓게 나눠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제의 성격에 맞춰 여러 주체가 역량에 맞게 결합하는 ‘책임의 연합’이 혼돈에 빠진 서구 중심 질서를 대체할 대안이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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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질서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세계 질서는 한 문명이나 강대국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서구의 지배 이전부터 다양한 문명은 외교와 평화 유지, 공존 규칙, 무역, 주권, 다양성을 관리하는 제도와 관행을 발전시켰다. 질서는 (특정 국가가 자신의 규칙을 세계에 적용하려는) 보편적 지배가 아니라 서로 다른 공동체의 공존을 통해 형성될 수 있으며, 국제규범도 상호작용과 상호차용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멀티플렉스 세계는 이러한 과거 질서의 다원성을 회복하면서도 현대 제도, 보편적 인권, (공급망 등을) 상호 의존하는 글로벌 현실까지 껴안은 ‘포스트 서구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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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티플렉스 세계에서 책임과 리더십은 어떻게 작동하나.
“모두가 모든 일에 책임을 지거나 리더십이 사라지는 세계가 아니다. 리더십이 분산되고 사안별로 달라진다는 의미다. 어떤 국가는 기후 금융, 다른 국가는 지역안보와 보건을 각각 주도할 수 있다. 국제기구와 기업, 시민사회도 다른 영역에서 기여할 수 있다. 한 강대국이 세계 거버넌스(협의·관리)의 모든 부담을 떠안을 필요가 없다. 위기상황에선 ‘‘책임의 연합’이 필요하다. 자원과 역량을 가진 주체는 더 큰 책임을 지고, 영향을 받는 주체는 대응 방안을 결정할 때 의미 있는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 목표는 정당하고 투명하게 부담을 나누는 것이다. 주요 20개국(G20)은 불완전하지만 이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여러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기업·비영리 단체 등)가 사안별로 참여하는 다양한 형태의 ‘지(G)-플러스’ 협력체도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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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원화된 연합 속에서도 보편적 인권의 가치가 지켜질 수 있을까.
“우선 민주주의와 인권은 서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서구 이외의 많은 사회도 정의와 존엄, 정치적 참여, 인간의 복지에 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인권을 여러 문명과 정치적 투쟁이 함께 만들어낸 성과로 이해할 때, 인권의 정당성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다.
다만 문화적 다양성이 고문과 자의적 구금, 차별처럼 인간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동시에 서구가 정당한 정치적 가치를 독점적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멀티플렉스 세계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모두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공통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특정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지역기구, 국제기구, 시민사회, 시민이 참여하는 대화와 상호 책임을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
— 서구 중심 질서가 약해지는 가운데, ‘나머지 세계의 귀환’이 새로운 위계 질서를 낳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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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를 세계 질서 중심에서 끌어내린다고 평등한 세계가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신흥 강대국이 새로운 위계적 행위자가 될 수도 있다. 멀티플렉스 세계는 미국 단극 체제가 중국으로 바뀌거나, 혹은 미중 양극 체제, 소수 강대국 중심 다극 체제로 대체되는 걸 뜻하지 않는다.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다층적 거버넌스가 핵심이다. 중견국과 중소국, 지역기구, 시민사회가 국제 사회 의제를 만드는 데 실질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아세안(ASEAN)이나 아프리카연합(AU) 같은 지역기구를 강화해 강대국의 의제 독점을 막고, 세계 질서를 민주화해야 한다.”
— 이러한 전환기에서 한국의 역할은 무엇일까.
“한국은 식민 지배를 받고, 전쟁을 겪은 비서구 사회이자 서구 주도 제도에 통합돼 고도로 발전한 민주국가다. 두 경험을 아우르며 양쪽 세계의 신뢰를 얻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특히 강대국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개방을 통해 발전한 모델은 (국제적) 고립 또는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개발도상국들에게 귀중한 자산이다.
또한 한·중·일과 동남아 10개국이 참여하는 ‘아세안+3’ 체제를 이끌고 역내 금융 안전망(치앙마이 이니셔티브)을 정착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금융·기술·보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포용적인 지역 협력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문화 영향력(소프트 파워)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뛰어넘는다. 한국은 스스로를 미·중 경쟁에 종속된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세계 질서의 공동 창조자’로 인식해야 한다. 중견 강국인 한국이 패권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혁신·민주주의·경제 개방·지역 협력의 조화를 보여주는 것이 멀티플렉스 세계에 대한 가장 가치 있는 기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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