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성폭력 피해자 목소리, 재판에 더 담아야”…신숙희 대법관 인터뷰
신숙희 대법관이 17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열린 제20회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신숙희 대법관(57)은 몇 년 전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특별재판소를 방문했을 때 특별한 점을 발견했다. 검사와 피고인뿐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자리가 법정 내에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형사재판의 큰 틀이 검사와 피고인의 대립 구도로 짜여 피해자의 참여가 제한적이고, 법정에도 피해자를 위한 별도의 자리가 없는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신 대법관은 지난 17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진행한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형사재판의 전통적인 구도를 넘어 피해자를 헌법상 권리를 가진 주체로 바라보고, 피해자가 실질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를 넓혀가야 한다고 밝혔다. 신 대법관이 2024년 3월 대법관으로 취임한 이후 언론과 인터뷰한 건 처음이다.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신 대법관은 여러 젠더 폭력 사건에서 사법부가 피해자 권리를 두텁게 보장하고 법원 내 다양성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지난 18일 제20차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회의에서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사건에서의 법원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하기도 했다.
신 대법관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피해자는 형사재판의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배웠다. 그러나 헌법에는 ‘형사 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당해 사건의 재판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며 “헌법을 생각하면 피해자를 대하는 판사의 시각과 차원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오는 10월 개정 형사소송법 시행을 앞두고 범죄 피해자 문제가 큰 쟁점으로 떠오른 상태다. 검사의 직접·보완 수사권이 폐지되면서 취약한 환경에 놓인 피해자들의 권리 보장과 피해 회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성폭력 사건에선 ‘왜 빨리 신고하지 않았나’ ‘피해를 입은 사람 같지 않다’ 등의 ‘피해자다움’의 고정관념이 수사기관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지적이 많다. 법정에서도 증인신문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벌어지기도 한다.
신 대법관은 “고정관념을 쉽게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비난만 해서도 해결하긴 어렵다”며 “이럴 때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같은 헌법적 가치를 공통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과거 고등법원에서 성폭력 사건을 재판할 때 피해자 측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려 했다고도 말했다. 그는 “처음에 법을 배울 때만 해도 성범죄는 ‘정조에 관한 죄’로 분류됐다. 사회가 빠르게 변하면서 제도가 바뀌어도 옛날에 학습한 관념을 한번에 바꾸기는 쉽지 않다”라며 “법관 역시 계속 교육을 받고, 새로운 걸 배우면서 ‘업데이트’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숙희 대법관이 17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열린 제20회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신 대법관은 사법부와 수사기관의 인식은 느리지만 꾸준히 바뀌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아·태 회의 발표에서 1964년 성폭력에 저항하다가 상대의 혀를 절단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지난해 재심을 통해 61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씨 사건을 언급했다.
이어 1988년 유사한 유형의 사건에서 피해 여성이 기소됐으나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례, 2020년 검찰 단계에서부터 정당방위로 인정돼 불기소 처분된 사례도 소개했다. 수십년 전만 해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순결성 감정’을 하고, 처음 보는 남성에게 ‘키스하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한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처벌하던 법원과 수사기관의 판단이 점차 변화한 점을 설명한 것이다.
특히 대법원은 최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면서 과거 재판의 순결성 감정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인격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등을 중대하게 침해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신 대법관은 “한 세대에 걸쳐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졌는데 수사와 재판에서 아주 큰 변화가 있는 걸 보면, 우리 사회가 변한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신 대법관은 가사·가정폭력 사건에서도 법원의 역할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 대법관은 “가사 사건과 가정폭력 사건에선 세계적으로 법원의 기능이 단순히 사후적으로 사건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후견적 입장으로 넘어가는 단계”라며 “미국은 가정폭력 법원, 약물 법원 등으로 나뉘어 있지만 한국은 중간 단계이다. 앞으로 이런 부분도 예산과 인력이 확충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신 대법관은 법관 개인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약자였던 경험을 계속 떠올리면서 재판하는 게 필요하다”며 “사람은 언제나 약자의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걸 생각하며 역지사지의 자세로 재판에 임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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