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도 놀란다”…조선시대 도깨비 영화 30시간 만에 ‘뚝딱’

지난 18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 영화관. 스크린에 조선시대 도깨비가 등장하고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인공지능(AI)으로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보니 일부 장면에서는 특유의 인공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그러나 정교하게 구현된 배경과 인물의 모습, 컴퓨터그래픽(CG)을 활용한 듯한 시각효과와 상상력 넘치는 설정을 보고 있자니 놀라움이 앞섰다. AI로 이 정도까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작품들이 단 32시간 만에 완성됐다는 것이다.
이날 열린 행사는 글로벌 AI 영상 제작 플랫폼 탭나우가 주최한 ‘아레나 피크 아시아(Arena Peak Asia)’ 한국 대회 시상식이다. 탭나우는 AI 영상 창작 기업 타마AI가 운영하는 플랫폼이다. 클링AI와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이 공동 주최했다.
대회는 서울과 도쿄, 상하이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한중일 160개 팀이 참가했으며 한국 본선에는 40개 팀이 올랐다. 참가자들은 ‘메아리와 감정의 공명’을 뜻하는 ‘E.C.H.O.’를 주제로 시나리오 작성부터 이미지·영상 생성, 편집과 음향 작업까지 32시간 안에 마쳐야 했다. 완성해야 할 작품은 180초 이상의 AI 단편영화였다.
시상식에 앞서 무대에 오른 최정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교수는 밤을 새워 작품을 완성한 참가자들의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참가자들이 피로를 견디면서도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려는 의지가 돋보였다”며 “수상 여부를 떠나 함께 작업하며 쌓은 경험도 중요한 성과”라고 말했다.
이날 심사에는 최 교수와 민규동 영화감독, 이정현 배우가 참여했다. 심사위원들은 한국을 비롯한 각국 출품작을 살펴보며 독창성과 이야기 구성, 시청각 표현, 기술적 완성도, 감정 전달력 등을 평가했다.
민 감독은 AI 영상 기술의 발전 속도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는 지난해 AI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당시 3분 분량을 완성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불과 1년여 만에 창작자들이 32시간 안에 다양한 장면을 구현할 정도로 제작 환경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정현 배우도 AI 영화의 가능성과 발전 방향을 함께 짚었다. 그는 “AI의 발전을 오늘 보면서 배우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라는 고민과 함께 배우로서는 정말 슬펐다”라며 “그렇지만 아직 인간 감정에 대한 그런 섬세한 연구는 조금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반면 실제 배우의 연기처럼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한 작품도 있어 놀랐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작품의 독창성을 주요 심사 기준으로 삼았다. AI로 시나리오를 만들다 보면 서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사람이 얼마나 개입이 되는가도 중요하다”며 “이야기 독창성을 더 많이 평가기준으로 뒀다”고 말했다.
실제 수상작에서는 한국 창작자들의 문화적 배경과 개성이 주목받았다. 동상을 수상한 YAHO 팀은 한국의 민속 설화와 역사적 배경을 작품에 담아냈다. 같은 AI 제작 도구를 활용하더라도 창작자가 어떤 소재를 선택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이번 행사를 개최한 타마AI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 본사를 둔 AI 창작 기술 기업이다. 주력 플랫폼 탭나우는 전 세계 150개 이상 국가와 지역에서 400만명 이상의 전문 사용자가 이용하고 있다.
타마AI는 칸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 등에서 AI 창작자들의 작품을 소개해 왔다. 지난달에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AI 기반 시리즈 콘텐츠 플랫폼 ‘글랜즈(Glanze)’를 선보였다. 단편영화나 초기 아이디어를 연속성 있는 콘텐츠와 지식재산(IP)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국내 창작자와의 접점도 넓히고 있다. 탭나우는 부산국제영화제의 공식 마켓인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에 참가한 데 이어 지난 24일 제18회 서울국제초단편영상제 기간에 열리는 ‘서울 AI 영화의 밤’에서 수상작을 상영했다. 앞으로도 국내 상영회와 창작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창작자들의 해외 진출 기회를 확대할 계획이다.
32시간의 제작 경쟁은 끝났지만 AI 영화의 과제는 남아 있다. 제작 기술이 발전할수록 누구나 영상을 만들 수 있는 환경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날 심사위원들이 공통으로 강조한 것은 기술의 화려함보다 이야기의 독창성과 인간의 감정이었다. AI가 영화 제작의 문턱을 낮춘 자리에서 결국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는 창작자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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