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NFollow live: Ramirez's error paves way for Rays' rallyESPN DeportesOhtani estará en alineación de Dodgers en J3 vs. BrewersPunchTinubu has done more for North — YilwatdaThe Jerusalem PostIDF chief vows to apply October 7 lessons, pledges to pursue Israel's enemies at military ceremonyCNN TürkKırmızı bültenle aranan cinayet şüphelisi Mardin’de yakalandı한겨레“부가 흘러나가는 도시에서 머무는 도시로”…부를 쌓는 해법 찾다UOLPGR diz que não há evidências de que Mendonça foi alvo de arapongagem por cúpula da PFZDF heuteEntdecken Sie das ZDF-NachrichtenstudioEl ComercioTemblor en Chile hoy, martes 13 de octubre: hora exacta, epicentro y magnitudReality Blurred3 new reality competitions, including Assassin, and 2 revivals中国新闻网A股开盘:超3400只个股飘绿,三大指数集体低开La NaciónMurió Netinho, el artista detrás de la exitosa canción “La isla del sol”
The Daily Newsstand · Free, Always
Wednesday, October 14, 2026

화차에서 똥을 못 참는 4살 꼬마의 부산행 [금자⑲]

Translate
한국전쟁 당시 열차를 타고 부산을 향하고 있는 피난민들. 지붕에도 사람들이 빼곡하다. 연합뉴스
한국전쟁 당시 열차를 타고 부산을 향하고 있는 피난민들. 지붕에도 사람들이 빼곡하다. 연합뉴스

광고

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저는 화차를 탔어요.”

2살 막내 호기를 업은 12살 금자와 8살 호각, 6살 호완이 걸어서 남쪽을 향해 피난 가던 때, 4살 호림은 작은형인 16살 호주와 함께 서울역에서 출발한 부산행 화물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지붕에도 피난민이 한가득이었다. 역대급 한파와 함께 한 1·4후퇴였다. 문이 닫히지 않는 열차 안도 바람을 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화차 바닥에 깔린 왕겨에 손발을 묻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화장실이 없는 화물차 안에서 호림은 한참을 끙끙대다 바지를 입은 채 그대로 실례를 하기도 했다. 바지를 털기 위해 뒤집어 벗자, 그새 똥이 얼어있을 정도로 극한의 추위였다. 열린 문틈으로 강풍이 얼굴을 때렸다. 그렇게 열 몇 시간을 간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강호림 선생을 만난 때는 4월 하순이었다. 누님인 강금자 여사님과 첫 인터뷰를 한 뒤 보름여 만이었다. 노원구 월계동의 아파트로 오라고 했다. 1호선 광운대역에서 내려 1km 넘게 걸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지었다는 미로 같은 아파트 단지 사이를 30여분 헤맸다. 초면은 아니었다. 반민특위와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들이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얼굴을 본 적 있었다.

광고

올해 81살인 그는 투병 중이라고 했다. 2019년 1월 호흡곤란으로 응급이송되어 특발성 폐섬유증과 심장혈관 및 판막 손상 진단을 받았다. 폐섬유증이란 폐 조직이 굳고 딱딱해져 격렬한 기침과 극심한 호흡곤란이 동반되는 질환인데,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을 유발할 수 있는 심장질환까지 겹쳐진 거였다. 만나기 전날엔 “기침 때문에 인터뷰가 될지 모르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다행히도 방문 당일에는 기침이 덜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76년 전인 1950년 12월 초, 꼬마 호림은 누나 금자와 함께 명륜동의 혜명보육원으로 몸을 옮겼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납치된 이후, 금자 누나가 돌본 동생은 호각과 호기, 그리고 호림이었다. 호완이는 작은 오빠가 명동 집에 데리고 있기로 했던 터였다. 그런데 혜명보육원에 가자마자 호림의 손가락에 ‘옴’이 감염되는 일이 발생했다.

광고

광고

극심한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옴(Scabies)은 당시 유행하던 대표적인 피부질환으로, 이 병에 걸리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옴진드기가 쉽게 옮겨지기 때문이었다. 동생의 손가락을 본 금자는 바로 호림을 데리고 명동 집으로 돌아갔다. 호완과 함께 있던 작은 오빠는 상비약을 찾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찾아갈 병원도 전무했다. 오빠는 호완과 호림을 바꾸자고 했다. 자신이 호림이를 맡을 테니, 호완이를 대신 혜명보육원으로 데려가라는 거였다. 그렇게 호림은 16살 작은형과 공동운명체가 됐다.

“집에 작은형이랑 둘만 있었나요?”

광고

“아뇨. 혼자 있었어요. 형은 학도병으로 끌려갈지 몰라 인천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피신했죠.”

“4살 꼬마가 혼자서 어떻게….”

“낮에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얻어먹기도 하고 굶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이상한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쳤어요. 귀 가리개가 드리워진 방한모에 누런 담요색깔 나는 군복 입고 머리는 빡빡 깎았어요. 낮에는 어디엔가 있다가 밤에는 우리 집으로 들어와 먹고 자고 했어요. 어느 날은 그중 한 명이 저에게 주먹밥을 하나 줬어요. 정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맛이에요. 평생 그들이 중공군이라고 기억해왔는데, 누나는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시기가 아니라고 해요. 그럼 국군이었을까, 근데 국군 군복보다 색깔이 누랬어요.”

“작은형은 언제 왔나요.”

광고

“1950년 12월 말이었을 거예요. 집에 들어와 제 꼴을 보고 막 웃는 거예요. ‘수표교 밑의 거지보다 네가 더 상거지’라면서 놀렸어요. 그러고는 군복으로 변복하고는 저를 군 배낭 위에 올려 태웠어요. 서울 수복된 직후부터 국군 정보장교들이 우리 집에 군홧발 신고 들어와 사무실로 썼다고 하거든요. 그래서인지 군복이 어딘가에 있었던가 봐요. 그걸 찾아낸 거죠. 그리고 저랑 서울역으로 갔어요.”

“왜 군복으로….”

“그때 16살밖에 안됐지만 징집돼 끌려갈 수 있었어요. 군복 입고 저를 데리고 가다가 ‘웬 아이냐’고 누군가 물으니까 ‘고아인데, 불쌍해서 데려간다’고 했대요. 군인 행세하는 게 더 안전했답니다.”

“옴만 안 옮았다면 형이 아닌 누나랑 피난 갔을 텐데요.”

“누나가 ‘난 죽어도 동생과 같이 죽는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요. 그런데 옴이 걸려 혜명보육원에 함께 있을 수 없었던 거죠. 명륜동에서 명동까지 누나가 데려다줬는데, 누나 맘이 어땠겠어요.”

4월22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자택에서 만난 강호림 선생. 고경태 기자
4월22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자택에서 만난 강호림 선생. 고경태 기자

이 대목에서 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가에 대고 한참을 있었다. 4살 호림은 누구와 함께 있기를 원했을까. 12살 누나였을까, 16살 형이었을까. 그에게 양 갈래 길에 섰다면 어떤 선택을 했겠느냐고 묻자 “아무래도 누나가 아니었겠냐”고 조심스레 말했다. 엄마 사랑을 빼앗아간 2살 호기가 엄마가 사라진 뒤 누나 등에 업혀 있는 모습에 시샘을 느낄 때였다.

호림은 열차에서 고생했지만, 작은형과 함께 부산 고모부 집에 신속히 닿았다. 나머지 형제들도 다 이곳에서 모이리라 믿었다.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는 “서울 시민의 경우 (1950년)12월30일까지는 이미 84만명이 철수했고, 1월3일까지는 나머지 30만명이 피난했다”*면서 “많은 서울 시민들이 열차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전체 피난민 중 각각 열차와 도보를 이용한 이들의 비중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다.

고모부 집은 부산 서구 동대신동 꼭대기에 있었다. 산자락이었는데, 인분 냄새가 많이 났다고 기억한다. 작은형은 또 몸을 숨겼다. 나중에 들어보니 하야리아 부대에서 하우스보이, 즉 소년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하야리아 부대란 부산진구 범전동 일대에 있던 주한미군 기지 ‘캠프 하야리아’였다. 호림은 명동에서처럼, 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부산 고모 집에는 식구들이 많았어요. 아마 8남매였을 거예요. 눈만 뜨면 ‘서울내기’ 하면서 놀리는 듯해 괴로웠어요. 무슨 일 생기면 큰형이 동생들 모아놓고 야단치며 때리기도 했는데, 저는 안 맞았지만 늘 불안했지요. 도망갈 궁리만 했어요. 전차만 타면 서울 가는 줄 알고 동대신동 전차종점으로 가서 서성거리다가 잡혀가고 또 혼나고 했죠. 그러다가 설을 쇠고 함안 가는 기차에 태워졌어요. 제가 자꾸 가출하려고 하니까 함안의 할아버지 댁에 보내야겠다고 고모와 고모부가 의논한 것 같아요. 이불 보따리 하나 메고 함안 가는 열차를 탔어요. 제 등에는 함안 주소를 적은 종이를 붙였어요. 화물에 붙이는 꼬리표처럼요.”

서울역에서 화물차를 타고 갔던 부산에서, 이번에는 ‘인간 화물’이 되어 함안으로 부쳐졌다. 1951년 2월의 일이다. 호림이 경전선 함안역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사람은 큰형이었다. 14살 더 먹은 큰형은 그날 전혀 살가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당분간 호림과 한 배를 탈 운명이었다. 아직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큰형 호걸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6·25전쟁사8-중공군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View the original on 한겨레 →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